바람 빠진 내 맘에 아이가 넣어주는 사랑

사랑하는 이들에게

by 조이아

집에 있으면 게임만 하는 둘째 아이의 시력 및 체력을 위해 주말에는 한 번씩 바깥 활동을 하고자 한다. 캠핑이나 격한 스포츠 같은 건 절대 안 하고, 동네 산책이나 하는 정도다. 일부러 둘째 비위를 맞추려고 포켓몬 카드가 나왔나 알파문구에 가보자며 이십 분 정도의 산책길을 제안했다. 다정한 큰아이는 나랑 팔짱을 끼고 조곤조곤 얘기하면서 가고, 재미없는 남편은 혼자 뒷짐을 지고 걷고, 작은아이의 걸음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인도는 여기에 두고 덜렁덜렁 팔다리를 흔들고, 지나가다 걸리는 나뭇가지를 어깨빵하고, 솔방울을 발로 차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걷는다. 손을 잡아도 뿌리치고, 나란히 걸을 수가 없다. 신발끈은 어째 저렇게 자주 풀리는지. 발걸음이 아빠 닮아 팔자걸음은 아닌지, 걷는 둘째를 보며 나는 못마땅하다. 도착한 문구점에 포켓몬 카드는 품절이고, 아이는 쿠키런인가 하는 카드를 몇 뭉치 움켜쥔다. 들르는 편의점마다 포켓몬 빵은 없다 하고 실망스러울 만하다. 그래도 잉어빵을 세 마리나 먹은 둘째는 뱃속이 든든한지 마음도 풀리고 몸도 풀렸다. 달달한 음료도 한잔씩 마시고 돌아오는 길엔 아까와는 다른 신나는 몸짓의 둘째가 보인다.


자신의 게임 시간은 끝난 저녁, 독서기록을 하자고 꼬드겼다. 주말 내내 유튜브와 게임만 할 수는 없지 않냐며 말을 건넨 건데, 이런 이유로 설득되지는 않았다. 알림장을 들이밀며 담임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편씩 독후활동 쓰라고 하셨잖아 했더니, 그제야 수긍하고는 <바다의 생물 플라스틱>을 다 읽었다고 자랑한다. 우리 둘째는 독서가 영 시원치 않아 한 권을 오래도록 보는데, 벌써 다 읽었다고 해서 놀랐다(비록 꺼내 준지 한 달 넘은 책이지만). 새 학년이 되면서 준비물에 늘 '읽을 책'이 있더니 학교에서 읽은 모양이다. 책을 읽자고 읽자고 해도 안 읽는 둘째에게 생긴 변화다. 마침 형이 친구랑 같이 게임을 한다고 노트북을 차지하고 있어서 당장 입력은 어려우니 일단은 무얼 쓸지 생각해보자고 했다. 뜨끈한 장판에 둘이 엎드려 일단 음성 메모에 녹음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나는 바다에 산다.'부터 시작해서(바다가 아니라 바닷가에 산다로 고쳐 주었지만.) 바닷가에서 발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들, 물고기가 먹은 플라스틱, 등등 정말 읽었구나 싶게끔 찬찬히 이야기를 한다. '실천'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 이야기에 놀랐다는 감정도 실린다. 음성 메모는 이미 6분이 흘렀다. 이 기세를 몰아 노트북을 기다리지 말자며 아이패드로 로그인을 했다. 자신은 한글 타자가 느리니 엄마가 듣고 쓰라던 아이였다. 아이패드로 들어가니 이건 빨리 칠 수 있다며, 본인이 직접 하겠단다. 이것이 유튜브를 많이 한 효과인가 싶었다. 과연 아이는 금세 내용을 작성해 나갔다. 제목은 뭘로 할까? '공포의 플라스틱' 어때? 하며 예전 우리 가족끼리 부르던 내 별명을 떠올려 보았다. '레고 넥소나이츠'가 등장하는 게임 중에 한 인물의 필살기가 '공포의 배고픔'이었는데, 그게 딱 나와 어울렸던 거다.(배고프면 화를 내는 사람.) 아이는 '쓰레기'의 쌍시옷도 찬찬히 변환시켜 가며 글을 입력했다. 나로서는 노트북 키보드가 편한데, 아이패드로 글쓰기를 그렇게 빨리 하다니 정말 감탄이 나왔다. 400자 이상 써야 한다며 조바심 내던 아이는 어느새 요구 분량의 두 배나 되는 글을 작성해 제출했다. 감탄사를 넣어가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었다. 아이의 입꼬리가 내내 올라가 있더니 자기 전까지 말투며 행동도 산뜻하게 느껴지고 표정도 밝았다.


열한 시 넘은 그 밤에 숙제를 한다는 큰애 때문에 여기저기 불을 켜놨더니 둘째가 잠이 안 온다고 내 침대로 왔다. 내 옆에 눕게 하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벌써 손이 도톰해지고 많이 컸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는 막내인 요 쪼꼬맹이가 여전히 아가라는 게 꼭 잡은 손에서 느껴졌다. 요 아이는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도 꼭 내 옆에만 오면 금세 새근새근 잠든다. 남편하고도 늘 '도빵이 왜 저래' 하며 사춘기가 왔다고 투털댔는데, 이때만큼은 아직 아기처럼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일은 걷기나 달리기처럼 내 안의 생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여러 번 연주해서 익숙한 곡이거나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곡들이 그렇다. 주말 오후 피아노를 치다가 문득,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주에 받아 둔 악보였는데, 그냥 음악으로 들을 때와는 다르게 울림이 전해지는 곡이었다. 제목도 너무 좋은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정재형의 곡이다. 제목 때문일까? 누구에게 선물처럼 들려주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치다가 영화가 생각 난 거다. 그것도 매우 생뚱맞은 영화가. 어떤 영화였던가. 조선시대 왕에 대한 거였는데 내게 떠오른 이미지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하는, 왕 역할의 소지섭 배우가 어머니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내 생각의 흐름이 참 엉뚱하다.) 영화를 볼 때에도 저 장면에서 참 놀라고 마음이 부산하기는 했다. 춤은 무희들이나 추는 건 줄 알았는데, 세상에나 왕이 춤을 추다니!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라면 가능하겠구나. 자식은 부모를 웃게 하니까. (지금 찾아보니 <사도>라는 영화다.) 여운이 긴 영화이긴 했지만 본 지 몇 년이나 흘렀는데 뜬금없이 저 장면이 생각나다니 이상했다. 그러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제 있던 일도 연달아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담을 마치고 큰아이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에 대한 대화로 힘을 많이 받고 나온다. 놀이치료실이므로 보드게임이나 포켓볼 같은 걸 신나게 하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풍선 몇 개와 공기주입기를 들고 나온다. 풍선에 공기를 넣더니 띄우며 논다. 두 개로 저글링을 해보겠다는 몸짓이 우스꽝스럽다. 풍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웃으니, 나를 웃긴다고 더 오버를 하는 것이다. 중학생이나 된 녀석이. 이 모습이 내게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나를 내려놓고 이런 개그를 한 적이 없는데. 이 아이는 어째서 이런 몸짓을 보여준단 말인가. 고작 나를 웃기겠다고. 피아노를 치다가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고, 곧이어 우리 아이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나는 이건 무슨 마음인지.


그러고 보면 우리 둘째 도빵이도 늘 엄마를 헤아린다. 영화를 보다가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우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장면에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놀리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상담 선생님도 그러셨지. 세상 모든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엄청 크다고. 내 작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사랑을 못 본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예쁜 우리 아이들의 전체를 보지 못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면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내마음을 숨기지 말고 더 많이 사랑해야지. 아이들은 어려서만 재롱을 부리는 게 아닌가 보다. 중학생도, 어른인 왕도 부모님 앞에서는 아기일 거다. 더불어 부모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부모님을 웃게 할 수 있는 내가 늘 투정만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로부터 나온 나를 인식하고, 잘해드려야지. 우리의 사랑엔 아쉬움이 없게 해야지.

공격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둘째를 위해 주문한 샌드백이 벌써 터졌다. 이 주도 안 되었다. 거실 한편에 우뚝 서서 아이의 강펀치와 발차기를 맞던 샌드백이 자꾸 고개를 숙이더니 바람이 빠진 거다. 둘째의 수색으로 구멍 난 곳도 발견했는데, 아무리 거기를 붙여보아도 또다시 스르르 기운이 빠졌다. 독서기록을 다 한 밤에 샌드백 다른 걸로 주문해 줄까 하고는 검색하다 보니 가격도 더 비싸고, 우리 거실 바닥에는 흡착이 안 될 것 같아서 아이와 상의했다. 이게 꼭 필요할까, 우리 진짜 필요한지 좀 더 기다려볼까 하고 말이다. 가격도 더 비싸다는 얘길 거드니, 가격을 보고 슬며시 웃으며 아이가 말했다. "이 돈으로 포켓몬 카드?"하고 슬그머니! 요 귀여운 꼬맹이를 위해 포켓몬 빵이나 줄 서서 사다 줄까. 열한 시에 편의점에 온다고 했는데, 난 그 시간이면 잘 시간인데.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어렵고나.

샌드백이며 풍선에 공기를 주입하듯이, 내 안에서 '사춘기', '아들'이라는 키워드로 새어나간 사랑도 다시 채우고 싶다. 그 풍선은 새어나갈 틈 없이 하늘을 향해 부풀기를. 아참, 엊그제 도빵이가 형이랑 풍선을 들고 공기의 무게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럼 헬륨 가스를 많이 먹으면 나도 날아가?"하고. 이렇게 나를 웃기는 우리 아들이 너무 멀리 날아가지는 않았으면. 우리 가까운 거리에서 많이 웃고 지내자, 아들아.

화사하고 향기로워 닮고 싶은 미모사


@ 정재형, <사랑하는 이들에게>

@ 아나 페구, 이자베우 밍뇨스 마르칭스 글, 베르나르두 카르발류 그림, <바다의 생물, 플라스틱>, 살림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