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말 영하로 내려간 마음, 데워주세요

매해 제로에서 시작하는 직업

by 조이아

마음산책 회원으로 종종 책 선물을 받고 있다. 마음산책에서는 직업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곽아람 기자님의 <<쓰는 직업>>이라는 책이 나왔다. 20년 차 기자로서 주중에는 기사를 쓰고, 주말에는 기사라는 제약 때문에 다 못 담은 마음을 수필로 쓴다는 뒤표지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맨 뒤 날개에는 지금까지 나온 직업 시리즈 목록이 있었는데, 제목들이 공들인 티가 났다. 먼저 편집자가 쓴 <<읽는 직업>>은 출간 때부터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번에 나온 책과 쿵짝이 맞는다. 카피라이터 김혜경 작가의 <<한눈파는 직업>>은 <<아무튼, 술집>>을 쓰시고(이걸로 소개하여 죄송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팟캐스트 <시시알콜>을 진행하시는 분인데 그분의 직업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뒤늦게(뒤늦게라니!) 수필로 등단한 유성은 작가의 <<나를 찾아가는 직업>>은 읽으면서 부러웠다. 작가 님이니까.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책방 주인인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은 제목부터 좋더니 표지 사진도, 글도 차암 좋았더랬다. 그런데 내 직업을 이런 식으로 제목 붙여본다면 어떤 이름이 될까?

'가르치는 직업'은 너무 식상하고 '시험 문제 내는 직업'은 너무 심오하다. '중학생들과 부대끼는 직업'은 너무 적나라한 것 같고 그렇다고 '칠판 앞에서 흘러간 지식을 붙잡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직업'도 속상하다. 교사의 본질은 지식 전달 말고 그저 사람됨을 지켜보고 성장을 위해 돕는 자 아닌가. 올해 2-3월 즈음에 썼던 글의 제목이 '매해 다시 시작한다는 특권'이었는데, 교사는 '매해 새로 시작하는 직업'일까. '매해 제로에서 시작하는 직업!' 처음 만나는 학생들과 관계를 처음부터 다져나가니까 말이다. 들고 다니는 교과서를 다시 처음부터, 혹은 새로운 책으로 처음부터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아이들과의 관계를 나는 잘 쌓아나갔는가.


학년말, 특히 중학교 3학년의 기말고사 끝나고 학교생활은 만만치가 않다. (지난주에 드디어 고입 원서를 제출했다.) 시험도 다 봤겠다, 원서도 썼겠다, 아이들은 졸업만 기다린다. 반마다 가정학습(코로나로 인한 가정학습)을 신청하고 집에서 공부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학생들이 몇 명씩 있다. 마음도 해이해져서 1교시 시작 종이 쳐도 등교하지 않고 급히 전화 걸어보면 "늦잠 잤어요."하고 헐레벌떡 지각하는 학생도 있다.

우리 학교는 핸드폰을 아침 조회 때 걷었다가 종례 시에 나누어준다. 가정학습으로 등교 학생 수가 적어서 핸드폰 가방이 가벼워진 나날들이 있었다가, 그날은 고입 원서 작성으로 가정학습을 받지 않고 전원이 등교한 날이었다. 종례 때 핸드폰 담당 학생이 교무실로 가방을 찾으러 와서 전해주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학생이 민망해 웃으면서 말했다.

"애들이 많이 안 냈어요."

그렇게 들고 가려는 걸

"잠깐만."

하고 지퍼를 열었다. 번호대로 칸칸이 수납할 수 있는 가림막을 넘기고 넘기는데 핸드폰은 고작, 달랑 하나였다. 가방은 두고 하나의 폰만 주머니에 넣고 종례를 하러 교실로 갔다. 복도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이 불쑥거렸다. 교칙 준수나 벌점 부여나 이런 것 말고 아이들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원서 틀리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애가 타게 작업하고 있는데. 학교생활기록부에 긍정적인 관점으로 성장을 기록하려고 얼마나 작문을 해대고 있는데. 점심시간에는 11월부터 2월까지 생일을 맞은 학생들에게 초코파이와 귀여운 선물 증정식도 한 날인데. 우리 반이 다른 반에 비해 밝고 분위기가 좋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기뻤는데 이렇게 내 말을 안 듣는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핸드폰을 낸 친구만 바보 만든 것 같아서, 그게 또 속상했다. 교칙을 잘 지킨 학생 빼고 다른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얼마나 신이 났을 것인가. 어디 안 보이는 데에서 했겠어, 교실에서 빤히 보였을 텐데. 핸드폰 낸 아이는 가방을 열었을 때 달랑 자기 것만 있는 걸 보고 어떤 기분이 들까. 그날 종례는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후에 이루어졌다. 핸드폰 낸 사람이 딱 한 명이다, 이 얘기를 차마 애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이들의 뻔뻔함에 왜 내가 부끄러운 것인지. 눈을 감게 하지 않았다면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나랑 눈을 마주쳤을 테다. 그 기만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못 견디는 순간은 착실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여럿이 바보 만드는 때인 것 같다. 나를 속였다는 것보다도 딱 그 포인트에서 더 화가 났는데 이번엔 대다수가 그랬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반장을 비롯하여 두어 명이 억울하겠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믿음의 가치,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라고 생각한다. 일하는 사이이든 친구 사이든 사제지간이든. 그런데 스무 명도 넘는 아이들이 감쪽같이 하루를 지냈다는 게, 그중에는 모범상을 받은 아이도, 선행상을 받은 아이도 있다는 게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담임으로서의 무능함을 고백한 것 같아 이런 글은 안 쓰려고 했는데 직업 얘기를 하다 보니 흘러나온다.

해마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정을 붙이는 직업. 그리고 12월 즈음이 되면 저절로 그 정이 떨어지는 직업이 이 직업인 것인지. 아이들이 내가 너무 질척거릴까 봐 그랬나 싶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에는 전날 안 가지고 왔던 핸드폰 가방이 교실에 없었는데, 다짜고짜 "선생님, 핸드폰 가방 어딨어요?"라고 묻는 학생이 있었다. 자기는 폰을 내겠다는 것을 어필하는 저 말투가 얼핏 같잖게 느껴졌다가 그저 아이로서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담임이 코로나로 일주일 간 자리를 비웠다가 출근한 아침, 교실에서 만나자마자 "선생님, 자리 언제 바꿔요?"하던 아이들이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도종환 시인의 시는 나를 다시 일깨운다.


반을 나와서 교무실로 가는 코너를 도는데 '외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7년 만에 하는 담임이었다. 3월을 맞이하며 오랜만이어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학년 선생님들이 우리 반 이야기를 하면 귀가 쫑긋해졌다. 학부모님들과 통화도 여러 차례, 마음을 끓이다가 전학을 보낸 아이도 있고 여전히 연락하며 지낸다. 북돋아주는 말들을 아이들 마음에 심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제로에서 시작하여 학년말에는 영하까지 내려가는 마음을 졸업을 앞두고 다시 덥히고 싶다. 점심시간부터 한 명씩 불러서 상담을 했다. 가정학습 들어가는 학생들부터. 일대일의 대화가 아이들에게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관계 회복을 위해 꼭 필요했다.(우리 착한 반장은 폰 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알리질 못했다며 반성했다. 아니, 내가 마음 달래주려고 불러서 대화한 건데. 내 마음의 온도가 쪼끔 올라갔다.)

우리반 반장도 책임감이 강하다.

졸업식 때 학급별로 무엇을 할 것인지 써내라고 한다. 김장성의 <<민들레는 민들레>>(이야기꽃, 2014)를 읽어주겠다고 썼다. 페이지마다 '민들레는 민들레'가 이어지는 그림책이다. 중3 졸업식과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중학교에서도 자기였듯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새 학교에서도 너 자신일 거라는, 그러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자기 모습대로 지내라는 응원으로 읽으려고 한다. 우리 반에서 땡땡이는 땡땡이로서 귀했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다. 땡땡이가 있어서 우리 반이 더 좋았다는 고백을 한 명 한 명에게 해주고 싶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참모습을, 자기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아이들이길 바란다. 자기 행동에 부끄럽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고, 자기를 아끼는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도 흐르길 바란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퍼지듯이 자신의 온기를 사회 구석구석에 전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우리 반 첫날 들려준 글귀가 김현 시인의 '모든 사랑은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을 경유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도착한다'였는데 남은 3주 동안 자꾸 알려줘야겠다. 마주하며 내 사랑을 전할 날이 이제 열흘 남짓 남았다. 이쯤되면 '매해 제로에서 시작하는 직업'이라기 보다는 '받는 것 없이 마음을 퍼주는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 곽아람, <<쓰는 직업>>, 마음산책, 2022

대문사진은 @수신지,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귤프레스, 2022

@ 김현, <<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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