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집엔 이거 없지?” 동백꽃 패러디하기
그 애가 교실에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쇼핑백을 들고 걔 책상 쪽으로 갔다. 역시 오늘도 일 등으로 왔구나. 다행이다, 하고 말을 건네려는데 아뿔싸, 벌써 남자애 둘이 뒷문으로 들어온다. 아씨, 망했다. 어정쩡하게 서서 말했다.
"야, 나 없을 때 필기한 거 다 줘 봐."
"뭐?"
괜히 노트 필기 핑계를 댔다. 가방도 못 내린 채 어안이 벙벙한 재석이에게 나는 또 쏘아붙였다.
"나 벨기에 현체 갔다 오느라 수업 못 들었잖아. 너 거 내놔. 내가 니 글씨는 알아봐."
"뭐래? 나한테 뭐 맡겨 놨어?"
"아니, 야, 이거 먹고 좀 줘 봐."
얼른 쇼핑백에 들어있던 상자를 꺼내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사뿐히 내려놓았어야 했는데 초콜릿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 걸로 보아 내 힘이 과했나 보다. 박스가 찍히진 않았겠지? 내가 저걸 사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빠듯한 시간에 면세점에서 고디바 매장 찾느라 공항을 몇 바퀴 돌았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심장이 쪼그라들고 가족들 잔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벨기에 제 초콜릿을 선물하고 싶어서 어떤 상자를 고를까 얼마나 고민했던지. 구시가지 광장에도 고디바 매장이 있었지만 들고 다니다가 상자 망가질까 봐 일부러 출발 직전 공항 면세점에서 샀던 것이다. 그것도 책상만하게 큰 걸로! 엄마가 결제를 할 때까지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해댔다. 이 큰 걸 누가 다 먹으라고 사냐, 이게 얼마 짜린 줄 아느냐, 계집애가 해외여행 시켜 줬더니 돈 아까운 줄을 모른다 등등. 이게 비싸고 좋다는 걸 내가 왜 모르는가. 기념품점이며 옷가게에서 내가 사고 싶었던 스노볼이랑 멋진 프린트의 티셔츠 등을 눈물을 삼켜가며 구경만 했단 말이다. 이 초콜릿 한 상자를 내 용돈으로 사겠다고. 그런데 얘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저걸 옆 자리에 밀어놔?
"야, 이재석!"
"이거 받고 공책 달라고? 됐어. 너나 실컷 먹어."
"야, 이거 고디바야? 고디바 몰라?"
됐다는 재석이의 음성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내 동공이 흔들렸다. 마침 등교한 재석이의 짝 민규가 말한다.
"야, 태리, 너 오늘부터 나와? 이건 뭐야? 현체 기념으로 쏘는 거야? 오올, 신태리, 이태리제야?"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이태리 하지 말랬지?"
열이 뻗쳐서 상자를 들고 내 자리로 와 얼른 쇼핑백에 처박았다. 책상 옆에 휙 걸고 내 머리도 책상에 처박았다. 분이 삭여지지가 않는다. 내가, 이 초콜릿 준비하느라고, 응? 비행기에서, 벨기에에서, 응? 그 유럽 대륙에서 몇 번이나 재석이 카톡 프로필을 눌러보고 다시 보고, 응? 인스타그램에 새 피드가 올라왔나 안 왔나, 스토리엔 뭘 올렸나,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랬는데! 아이고, 숨도 안 쉬어지네. 근데 이걸 안 받겠다고? 고디바가 뭔지 모르나? 비싼 초콜릿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엎드려서도 내 몸이 들썩이는 게 느껴진다. 오늘 아침엔 시차로 눈도 안 떨어지는 걸, 딴애들 오기 전에 재석이 주려고 새벽 알람에 일어나 준비하느라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민규는 내가 이걸 재석이한테 주려고 했다는 걸 알려나? 뭐? 현체 기념? 가만, 반 애들한테 하나씩 먹으라고 할까? 그럼 재석이가 하나라도 맛볼 텐데. 이 생각 저 생각 왔다 갔다 하는 내 얼굴이, 머리가 뜨겁다. 집 가고 싶다. 조퇴시켜 달래야지. 어제까지 2주나 현체였는데 담임이 조퇴를 시켜주려나. 정말 집 가고 싶다.
중2 교과서에 실린 동백꽃을 읽고 서술자에 대해 학습했다. 옛 소설이지만 아이들은 점순이 왜 저러냐며 재미있어했다. 소설의 한 부분을 2023년 버전으로 바꿔 써보자고 제안했다. 짝 활동으로 둘이서 몇 가지 설정을 공유했다. '나'의 이름, 점순이의 이름을 요즘 이름으로 바꾸되 특정인을 겨냥하지 않도록 반 친구 이름은 제외했다. 점순이 '나'에게 준 감자도 다른 물건으로 바꿔보았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 빛냈다. 짝이랑 이름을 짓고, 감자 대신 페레로 로쉐 초콜릿을 주겠다, 태블릿을 주겠다, 샤인머스캣을 주겠다 아주 신이 났다. 등장인물은 17세이지만 건물을 주겠다는 호기로운 아이들도 있었다. 재잘재잘 토의를 하고, 짝이랑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설을 쓰되, 한 명은 점순이의 입장에서 다른 한 명은 원작처럼 남자아이 '나'의 입장에서 써보자고 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을 갖고 학급 전체가 공책을 돌려 읽었다. 왼쪽에 앉은 아이들은 뒤로, 오른쪽에 앉은 아이들은 앞으로 파도타기처럼 자기 공책을 돌리는 것이다. 소설을 쓴 바로 아래줄에
‘*아름답게 감상해 주세요.’
라고 쓰고 자기 이름을 쓰고 댓글을 쓰도록 했다. 내가 쓴 공책도 돌렸다. 개중에는 설정만 해놓고 한 줄도 못 쓴 글도 있었고, 정말 매정하게도 '결국 둘 다 죽었다.'라고 쓴 글도 있었지만 재치 있는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도 많았다. 무스너클을 준다는 글을 읽고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새로 만든 줄 알았더니 옷 브랜드란다. 원작에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는 대화를
“야, 모둠 숙제를 너 혼자만 하니?”
로 바꾼 걸 보고 놀랐다. 저마다 다른 이름이었지만 남자주인공은 점순이의 마음도 모르고 무뚝뚝하게 점순의 마음을 거절하고, 점순이는 점순이대로 샐쭉하다. 지난번에 모방 시를 썼을 때에도 설정하느라 고민하다가 막상 시는 술술 써 내려가더니,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 없지?”
라며 감자를 준 일에 대해서는 섬세하게도 요즘에 걸맞게 잘만 쓴다. 그것도 신나게!
평소 수업 활동에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던 학생들이, 친구의 글은 공책에 코를 박아가며 읽고 댓글도 쓰는 모습에 너무 흐뭇했다. 자기 공책을 돌려받곤 친구들이 댓글에 뭐라고 썼나 술렁이며 읽는 모습도 어찌나 예쁘던지. 오늘의 수업 일기는 소설의 한 장면을 쓴 기분과 친구들의 글을 읽고 느낀 점, 친구 댓글을 보고 든 생각, 공책 돌려 읽는 활동의 소감 등을 쓰도록 했다. 종료령이 울리고 나서도 서로의 공책을 들여다보고 수업 일기를 쓰는 모습이 아름다워 기록한다. 사실 2023년 버전을 제안하고 나도 쓰면서 재미있었다. 모방 소설 쓰기 대회를 열어볼까.
@김유정, <동백꽃>, 1936
@ 위 사진은 장 줄리앙 전시 중, 그저 표현의 즐거움에 공감해서. Jean Jull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