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일상을 꿈꾸게 하는 방학
‘방학만 하면’을 앞세워 많은 문장들을 떠올렸다. 방학만 하면 늦잠을 자야지, 방학만 하면 여행을 가야지, 방학만 하면 집안 정리를 해야지, 방학만 하면 드라마를 봐야지, 방학만 하면 책장을 정리해야지, 방학만 하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야지 등등. 하고 싶은 일과 해야할 일이 번갈아 머릿속을 채웠다.
방학 때 해야할 숙제는 일단 아이들 병원 투어. 작은애 감기로 오랜만에 소아과엘 세 번이나 갔다. 나보다 키가 큰 초등학생이어도 내가 방학이 아니었으면 학원 가느라 평일엔 병원에도 못갔을 텐데 방학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그 아이는 나랑 나란히 걷지도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지만. 둘을 데리고 안과에서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알을 바꿔주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치과에 찾아가서 검진을 하고 충치 치료를 받게 했다. 부쩍 여드름이 많아진 둘째도 피부과 진료를 받고 여드름 관리를 시작했다. 이제 정형외과 한 군데가 남았는데 거북목과 굽은 등에 운동을 하라고 했거늘, 꼼짝 않고 폰과 한몸이 된 아들들을 어쩌면 좋을까. 아직 큰 숙제가 남았다.
집안 여기저기를 정리하고 손보았다. 책장 정리, 거실장 정리, 베란다 정리. 아직도 손 가야할 곳이 많지만 땀흘리며 이만큼 한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
만나고 싶던 사람들도 만났다. 같은 학교로 출근해도 각자의 교무실에서 업무 처리와 수업, 학생 지도로 마주치지 못하는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었고. 제자도, 전학교 동료선생님도 만나 회포를 풀었다. 엇, 친구는 북토크 보러갈 때 한 번밖에 못만났다. 서울 갈 일을 더 만들어야겠다.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역 공간투어를 했고, 가족 모두가 읽은 <불편한 편의점>을 연극으로 각색했다고 하여 뜨거운 날 대학로를 찾았다. 마침 함께한 중학생 단체관람객들 덕에 나의 집중력은 조금 흐트러졌지만(관람 전에 마신 맥주 한 잔 덕인 것도 같다) 우리 아들들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대서 뿌듯했다.
올여름의 가족 여행은 속초로 정했다. 동해와 문우당 서림, 동아서점을 노린 나의 결단이었다. 에어비엔비를 예약해놓고 바다에서의 시원함을 꿈꿨다. 학원 결석을 최소화하려고 주말을 끼어 떠났더니, 도로가 꽉 막혀 속초까지 여섯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다른 공간, 맛집 등은 우리를 들뜨게 했고 부쩍 무표정한 순간이 많아진 열두 살 사춘기 소년도 웃게 했다. (무표정하기만 하면 괜찮다, 나를 노려보며 인상을 쓸 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초에서도 서로의 얼굴보다 스마트폰 화면을 더 들여다보기는 했다만, 바다에 둥둥 떠서 함박웃음을 짓고 다른 맛의 젤라또를 먹으면서 많이 웃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색다른 무드가 우리를 고양시킨 것은 분명한데, 다섯시간 걸려 돌아온 우리 집은 새로운 숙소가 주는 신선함은 없지만 익숙하고 우리에게 딱 맞추어져 있는 편안함을 주었다.
방학 내내 비일상을 좇았다. 평소와는 다른 일정을 소화하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갔다. 방학을 마무리하며 생각하니, 모든 게 일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다시 시작될 일상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방학 내 애쓴 기분이다.
방학맞이 이벤트의 중간중간에는 평범한 순간들이 숨어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집안 곳곳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 에스프레소라도 안단테의 속도로 마시는 여유, 초록 식물에게 물을 주는 순간들은 어찌나 평화로운지. 이런 아름다운 일 말고 아침에 하는 환기와 청소마저도 솔직히 나는 좀 기쁘다. 청소가 신나는 건 아니고, 퇴근하자마자 집안 청소를 하는 건 숙제 같은데 아침에 해놓고 쾌적한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게 기분을 좋게 한다. 해가 쨍쨍할 때 빨래를 널 수 있다는 것에서도 작은 기쁨을 느낀다. 퇴근하고 하는 빨래는 해를 잘 못 보니까. 방학하고 제일 좋은 순간은 아침잠을 곤히 자는 아들들을 바라보는 일. 도무지 곁을 내어주지 않는 둘째의 뺨도 쓰다듬을 수 있고 첫째의 곱게 감긴 눈이며 얼굴을 한참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 시간의 고요가 좋아서 애들을 안 깨울 때도 많았다. “어서 일어나, 아침이야.”하는 말을 훨씬 여유롭게 할 수 있고, 깨우는 시늉만 하다가 애들을 자게 두고 밀린 일기를 쓸 때도 왕왕 있다. 라면을 끓여주어도 맛있다고 먹는 아들들을 보면서 같이 점심을 먹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청소기만 돌리면 땀이 주르륵 나는 한여름이었지만 집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우리 집의 안정, 어쩌면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큰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는 나날이 감사하다. 방학을 보내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겨 본다. 이제 곧 개학하면 이런 여유는 찾을 수 없겠지.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하는 김영랑 시인보다는 덜 절실한 마음으로 방학만 기다린다. 방학은 백오십일 뒤에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