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여 듣기, 듣기의 힘
귀가 예민한 편이다. 집에 있으면 인테리어 공사하는 소리, 위층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 새벽에는 윗집 핸드폰 진동 소리까지 신경 쓰인다. 듣기 싫은 음악도 참을 수 없다. 뽕짝 음악도 그렇고, 정신 연령을 알 수 없는 남편의 노랫가락(그것은 가락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나 '개똥벌레', 대리운전 광고음악, 가끔은 동요도 흘러나온다.)도 싫다. 소리가 없는 상태도 잘 못 견뎠다. 늘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아오던 내가 대학 때 한 달간 영어캠프를 한다고 기숙사에 머물던 때가 있었는데, 이인용 방에서 느껴지는 적막함, 혹은 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가신 기간 동안 우리 집의 적막함도 자명하게 인식되어 괴로웠다. 지금은 언제나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지내다가 어쩌다 혼자 있게 되는 집안의 고요함에 감사하지만, 내게 소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인식되는 무엇이었다.
듣기는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기분을 좌우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효과를 준다. 아침 햇살이 번지는 창가에 들려오는 새소리는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게 한다. 파리에서의 아침이 그랬다. 창문이 우리처럼 이중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새소리가 유독 잘 들렸는데, 그 소리로 아침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촉촉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콜마르에서 혼자 여행하던 때 들리던 이른 아침의 빗소리와 성당의 종소리 또한 내가 어딘가에 멀리 와있고, 편안한 상태라는 고요한 안정감을 전해주었다. 프랑스 남부 발렝솔에서 라벤더 밭을 보던 장면은 따갑게 내리쬐던 강한 햇살과 윙윙대는 벌 소리와 함께 기억된다. 눈 내릴 때의 그 고요한 소리는 어떠한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의 소리. 대학 때 본,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오던 그 영화의 눈 내리던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새로 연 카페나 식당에서는 그 집만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선곡에 힘을 준다. 뱃속 아가에게는 태교로 잔잔한 음악 혹은 두뇌 성장을 위해 모차르트를 들려주고, 식물에게도 음악을 들려줘 잘 자라는 데 도움을 주게 한다.
먹는 것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그가 듣는 것들 또한 그를 알리는 지표가 되지 않을까? 즐겨 듣는 음악이 그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즐겨 듣는 이야기들 또한 그의 정신 혹은 영혼에 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나의 귀로 들려오는 소리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음악이나 외국어 학습을 위한 듣기 또는 단순한 소리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알아차렸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었지. 이것은 내 귀가 그렇게 생겨서가 아니고, 내 입이 '나는 잘 들을 수 있어요'를 외쳐서도 아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는 평생에 걸쳐 듣기 연습을 해와서인 것 같다고 나는 결론 내려본다.
남편이 나를 이해 못하는 지점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이나 예민하게 구는 것이다. 나의 걱정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자꾸 듣게 되는 내 잔소리에 대한 불만이 많다. 본인도 참지 못할 때에 나에게 "왜 그래?"를 연발한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하는 남편 앞에, 나는 마구 화가 난다. 이렇게 나를 이해 못하는구나.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구나. 남편의 질문을 몇 차례 듣고 나서, 이제서야 남편이 했던 질문을 내게 던져보았다. 왜 그래? 왜 그랬지? 두서없는 감정과 생각들이 뒤엉키다가 엄마에게 비난을 듣기 싫은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엄마와의 관계라고 늘 생각해왔다.
관계의 바깥에서는 모를 모녀 관계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모녀가 이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예민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클 거다. 엄마는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련하시는 센스 있는 분이다.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대비하시는 편이다. 따라서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걱정도 많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모난 말을 듣지 않는 분이다. 모두가 환영할 만한 분이다. 대신 그 자리를 벗어나서 남에 대한 평가를 하신다, 내게. 비슷한 연배의 지인들에 대한 말씀, 이모네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 아빠에 대한 이야기. 그럼 나는 듣고만 있는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혀 감도 없었다. 그런데 나도 남들에게는 친절한 편이지만, 속으로는 남들에 대한 잣대가 엄격한 편이며 그런 내가 스스로 불편하다. 엄마로부터 이모네 며느리 흉을 들으며, 그 비난이 또 다른 엄마이자 아내인 나를 향한 것인 양 느껴질 때도 있다. 아빠에 대한 푸념을 들으며, 그런 아빠를 닮은 내 존재가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것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이런 듣기 연습을 평생 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서건 자신감이 없었구나. 그래서 내가 남들을 그렇게 의식해왔구나. 그리고 아직도 나는 엄마가 혹은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 전전긍긍하는구나. 어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일부러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좋은 말씀을 들려주며 곱게 아이를 키워도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는 알 수 없는데, 나는 남에 대한 비난을 계속 듣고 자란 것이다. 그것도 그 화살을 내게 겨누어 가며.
허지원 교수님의 책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쓰다듬고 찬찬히 읽어가며 나를 달랬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문장을 붙들고, 듣기 연습을 해온 나의 장점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았느냐. 나는 남들의 속내를 들어주고, 그들이 더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반응해 그들의 마음의 짐을 조금 거들어주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다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렇게 나를 돌아볼 수 있지 않느냐.
단점과 장점은 양날의 칼처럼 함께 있다. 예민한 귀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겠다. 듣기 싫은 소음은 차단하듯, 날카로운 말들은 사양하겠다.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내가 선택해보겠다. 나 또한 남들에게 아픔이 될 말은 내뱉지 말아야겠다. 우리 아이에게, 또 내가 만날 아이들에게 양분이 되는 말들을 표현하겠다.
소리의 높낮이로 내 귀로 들어온 것들이 나를 키웠다. 듣기 싫은 말들이 아직 내 안에 쌓여있지만, 귀 기울여 들어왔던 자연의 소리들도 나를 키워 왔고, 내 안에서 그 소리를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바람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내는 소리, 아비뇽의 바람은 내게 그렇게 햇빛의 반짝거림과 함께 떠오른다. 듣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또한 나를 미소 짓게 하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가 매일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애써 들으려고 노력했던 것들도 있다. 우리 집을 채우는 클래식 라디오 채널의 음악, 나를 나른하게 하는 재즈 음악, 그리고 언제든 내 안에서 재생되는 이소라의 음악. 이 모든 것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나는 내 존재로 내보이겠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들이 나의 평정심을 마련했을 거다.
내가 보기 싫어하는 엄마의 잔뜩 찌푸린 이마를 물려받지 않기 위하여, 나는 좋은 소리들로 나를 가꿔 나가겠다. 편안한 얼굴로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의 다정함을 은은하게 퍼뜨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