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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Jul 28. 2024

나의 눈부신 친구와 함께 2

여름방학 최대 이벤트

숙소에서 지내는 내내 웰컴재즈가 함께 했고, 쾌적하고 안심하는 시간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낯선 곳에서의 첫밤엔 잘 못 자는 편이다. 일부러 침대 두 개, 이번에는 방도 다른 데에서 잤음에도 불구하고 빗소리에 뒤척였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자고는 했으나, 큰아들이 기숙사에서 아침 먹는다고 보낸 모닝 카톡에 잠이 달아났다. 각자 책을 읽다가 씻다가 식탁에 모였다. 친구가 아침을 준비해 오겠다고 했는데, 과일 도시락을 푸짐하게 싸서 냉장고에 넣어둔 거다. 단호박과 복숭아, 파프리카, 체리까지 구성이 너무 좋은 두 개의 도시락을 놓고 마주 앉아 아몬드우유를 마시며 흐뭇한 식사를 했다. 환경에 진심인 과학 교사로서 친구는 고등학생들과 고기 없는 월요일을 여름 한 달간 진행한다는데, 아침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비건으로 사는 친구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예매해 둔 피크닉 전시를 위해 회현역으로 향했다. 전에 H, J와 함께 방문한 정원 전시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전시 주제는 달리기라니, 달리기를 생활화하는 H에게도, 달리기에 흥미를 붙였으면 하는 나에게도 딱이었다. 관람 전에 피크닉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전엔 카페를 이용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이른 시간에 와보니 통창으로 보이는 초록도, 커다란 테이블과 다양한 샹들리에도 너무 운치 있고 힙했다. 가까웠으면 자주 와서 이 공간과 시간을 즐길 텐데.

전시는 과학적인 내용도 있었고 러닝머신 위에서 달릴 수도 있었으나 내 흥미를 끌진 못했다. 오히려 문장들에 감탄했다. 류준열 배우가 마라톤하며 느낀 단상을 사진 위에 1부터 42까지 써놓은 문장들은 일단 글씨부터 너무 예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달리기에 관한 문장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옥상에 이어지는 전시는 하얀 구름과 하늘이 열일해 습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내 달리기 음악을 선곡해 주겠다는 키오스크를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달리기를 명상으로서 한다는 문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리기를 명상으로 할 수 있다고? 달리기를 떠올리면 땀나고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명상으로서의 달리기라니. 맞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기분 전환도 되고 그러는데 명상으로 즐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헉헉대는 달리기가 아니어도 된다는 얘긴가 싶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선곡도 궁금했지만 천천히 내 호흡으로 달리기 해도 괜찮다는 깨달음 하나를 얻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굿즈를 구경하다가 하늘색 양말 두 개를 골랐다. 전시회 슬로건인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가 영어로 쓰여있었다. 달리기를 추천해 준 H에게 하나, 나에게 하나 선물. 이 양말을 신고 가뿐하게 달려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서 수프와 샐러드, 리조토를 먹는데 비가 쏴아 쏟아진다. 그러고 보니 어제오늘 우리는 비를 잘 피해 다녔다. 밤에 숙소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그때부터 후드득 떨어지는 비는 밤새 내렸다 그쳤다 했고. 식사 시간 동안 비가 계속 내릴 것처럼 하더니 어느새 환하게 개었다. 하늘도 이 일이 내 방학의 최대 이벤트임을 알았던 걸까. 마지막 코스로 알맹상점을 구경하고 헤어졌다. 오는 길에 시간이 순삭 되는 일은 없었지만 밀린 '일기떨기'를 찾아 들으며 편안한 여행을 마쳤다.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그리웠던 고양이 겨울이를 한참 쓰다듬었다. 머리 뒷부분이랑 턱 밑을 한참 쓰다듬으며 '보고 싶었어' 고백하는 기분이 참 좋았다.

내 이벤트가 끝난 것은 아니어서, 김하나 작가님께 책의 작가님 등장 부분을 읽으셨다는 스토리 답장도 받았다. 기쁜 고백을 길게 써서 보냈더니 다른 부분도 읽어보시겠다고 답장해 주셔서 이벤트의 꿈같은 시간이 이제야 완성된 것 같았다.


내 도서전 및 북토크 메이트이자 책장을 공유하고, 언제나 공감을 선물해 주는 친구 H와는 학교, 아이들, 달리기, 비건(나의 경우는 그저 비건 응원인이자 지향인이지만) 이제는 고양이 이야기까지 나눈다. 최근에 멋진 성취를 이루어낸 친구가 너무 자랑스럽고도 질투가 나서 나도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한 말, "실패해도 좋았어. 안 해도 되는 걸 도전한 거잖아." 이 말을 듣고, 의욕이 샘솟았다. 실패하면 어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래도 내가 들인 시간이 어딘가엔 남겠지.


6월 국제도서전에서 구입한 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들려 보냈다. 미화리 작가의 <엔딩까지 천천히>를 친구가 먼저 읽고 보내주었는데, 친구에게 받은 엽서를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작년에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내가 먼저 읽고, 친구에게 추천하며 올해 초 그 두꺼운 소설들을 안겼다. 친구가 재미있게 읽었다며 보내온 엽서에는, 어쩌면 우리 관계도 소설 속 두 사람처럼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가 아닐까 쓰여 있었다. 그들처럼 엄청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사를 겪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다. 책 좋아하고 서점 찾아가기를 즐기고, 내향인으로서 학교 생활을 한다. 고양이를 영업한 것도 이 친구. 덕분에 나는 커다란 기쁨을 알았지 뭐야. 친구와의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린 모녀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육아와 상담, 꿈 기록을 통한 무의식도 서로 살펴왔다. 무슨 일이든 그 감정을 읽어주고 서로를 북돋아주는 이 우정이 너무 소중하다. 친구가 한 말처럼 엔딩까지 천천히 가고 싶다. 두 편에 걸쳐 쓴 이 긴 글은 어쩌면 친구에게 보내는 답장일 수도 있겠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2편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1편은 여기 https://brunch.co.kr/@gioiadiary/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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