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아들과 단 둘이 여행
이번 여름 방학, 중1 둘째랑 단둘이 여행을 했다. 이건 방학 전부터 나의 계획이었고, 물론 말할 때마다 당사자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엄마랑 여행 가자'의 대답으로는 침묵과 더불어 '나 축구할 건데'라는 의외의 대답도 여러 차례 들었다. 말 없고 축구만 좋아하는 아들이 언제부터 어려운 중학생이 되었던가. 덕분에 당일치기 부산여행은 최애 책방지기 버찌님이랑 함께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들과의 시간은 필요했다.
아들과의 여행이 성사된 건 나의 늦은 개학 덕분이었다. 아들은 개학하고 나는 방학 중이니 '현장체험학습'을 치트키로 쓴 것이다. 아들이 딱 한번 친구 누구는 베트남엘 갔다 왔다더라 했던 걸 떠올렸다. 학기 중에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교사 엄마이지만 이번 방학, 학교 공사로 개학이 다른 데보다 일주일 가량 늦은 덕분에 아들과의 제주 여행을 실행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큰아들은 기숙사에 있고 남편은 고양이를 건사하기로 했다.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숙소를 찾았다. 여기저기 다니기보다 한 곳에 머물며 쉬고 싶어서 렌트도 안 하려고 했는데 남편의 충고로 렌터카도 알아보았다.
출발하는 아침, 주차는 제시간에 할 수 있을까 이래저래 신경을 쓰며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탑승. 설레는 마음은 유난히 더운 비행기 온도 탓에 날개가 접혔다. 곧 도착한다더니 관제탑 신호로 다시 공중을 날아 20분 후에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좀 늦게 제주에 도착하고, 렌터카를 받으면서 나로서는 렌트는 처음이라 서툴렀다. 전날 예약한 차에 사고가 생겨서 큰 차로 업그레이드 해주었는데 덕분에 나는 트렁크를 여는 법도 몰랐다. 도빵이에게 '엄마 내비게이션 보는 것 좀 도와줘' 이르고 제주 도로를 달렸다. 아들은 원래 하던 대로 차에 타자마자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나는 투덜댔다. 그래도 원하던 식당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으며 기분을 새로이 달랬다.
태풍 종다리의 영향으로 바다엔 들어갈 수 없었고 우산을 쓰고 걸으니 우산이 뒤집혔다. 빗방울이 가느다랄 때에 좀 산책을 하다가 숙소에서 쉬는 오후를 보냈다. 저녁을 먹고서는 비가 그쳐서 바닷물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다음날엔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해수욕을 할 요량으로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나갔다. 태풍 탓에 안전요원의 허락을 받고 들어간 바다는 맑았고 푸르렀다. 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밝게 웃으며 바닷물에 몸을 맡겼다. 안전요원이 둘이나 있는데도 불안이 많은 나는 센 파도에 혹시나 싶어 아이를 눈으로 좇으며 바닷가에서의 독서를 즐겼다.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쉬고 예약해 둔 오름 투어를 했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오름을 오르고, 사진도 찍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덕분에 손 못 잡게 하는 아들과 손을 잡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아들이 원하는 메뉴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아들이 그런다. '내일도 걸어서 식당에 갈 거야?' 어제 렌트한 차는 오늘 단 한 곳, 숙소에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으러 다녀오는데 땀이 비 오듯 흘러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그 옷을 다시 입을 수 없었다. 남편이랑 왔다면 우린 가까운 곳도 차로 다녔을 거지만, 내게는 주차할 데를 찾는 것도, 좁은 제주 골목을 운전하는 것도 무섭기만 했다. '내일은 차로 갈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에 안 들었다. 멀리 있는 맛집을 가는 것도 좋지만 이왕 왔으니 주변을 충분히 즐기고 근처 식당을 이용하면 어때서.
삼일 째 새벽, 요가를 예약해 두었다. 자는 아들을 두고 요가 스튜디오까지 찾아가는데 해가 막 떠서 분홍빛의 구름을 보며 운전을 하는 기분이 참 좋았다. 나를 위한 시간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기분도 들었고, 이른 아침의 고요도 마음에 들었다. 돌담이 있는 좁은 길은 조심해 운전하면서 찾아간 스튜디오는, 전면의 유리로 제주의 오름과 하늘을 보면서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고작 2층인데도 이런 뷰를 볼 수 있다니, 여기서 요가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 하면서, 그 아침,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열심히 수련했다. 너무 최선을 다한 나머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곳에서는 곧바로 포기하고 쉬엄쉬엄 요가를 하고 나니, 그 고요한 한 시간이 내 안에 가득 에너지로 차올랐다.
아들을 깨워 차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진작 여기 와서 아침 먹을 걸 싶게 맛있었다. 든든한 배로 체크아웃을 해 자동차 여행을 했다. 오붓한 카페를 찾아가서 비를 피하고, 전에 네 식구가 갔던 식당에도 찾아가고 서점, 문구점도 들렀다가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도착 시간이 렌터카 반납시간보다 11분 더 소요된단다. 아뿔싸. 주유도 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텐데, 마음이 급해졌다. 탑승수속 시간도 맘에 걸렸다. 액셀을 밟으며 공항으로 향하는데 렌터카 회사에서 온 카톡.
"도빵아, 이거 좀 읽어봐. 뭐라는 거야?"
아들이 한참 읽더니
"과속하지 말래."
한다. 헉, 그 후부터는 손이 차가워진 채로 마음 졸이며 달렸다. 주유소 어딨는지 아들에게 눈 크게 뜨고 보라고 하고. 자연스럽게 아들은 조수가 되었다.
"몇 시까지 가기로 했어?"
먼저 묻기도 하고. 그 차 안에서 우린 대화라는 걸 조금 한 것 같다.
"엄마는 어른들은 다 어른이라고 생각했어, 특히 엄마가 되고서는 애들한테 완벽하게 보여야 될 것 같았어. 근데 그럴 수 없잖아. 엄마도 많이 부족하고 모르는 게 많아. 어제 차를 안 갖고 다닌 것도 엄마가 불안해서 그런 건데, 우리 아들이 땀 흘리면서 엄마 따라 걸어 다녀줘서 고마워.(숙소에 쉬게 두고 나 혼자 서점도 다녀오고 그런 건 모른 척하기로 한다.) 엄마가 운전을 계속했어도, 모르는 데에서는 능숙하지가 않아. 내비게이션 보는 것도 헷갈리더라. 출발할 때랑 도착할 때가 특히 그래. 그때는 도빵이가 잘 봐주면 좋겠어."
아들은 자기도 지도를 잘 못 보겠다고 한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그저 다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더랬다. 학교 얘기도 조금 하고, 풋살화가 갖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그렇게 렌터카 반납 장소로 갔다. 5분 정도만 지체되어서 정상 반납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저께보다 비행시간은 짧았고, 돌아오는 우리 차 안에서는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할 때 들었던(화요일이었다!) 여둘톡 팟캐스트를 마저 듣다가 끄트머리에 소개된 레드벨벳의 음악을 들으며 집까지 왔다. 그리고 실감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야 우리는 한 팀이었다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할 일은 많았다. 출장 간 남편으로 인해 우리는 또 둘. 다용도실에서 유난히 지저분한 아들의 크록스를 닦고 있는데 아들이 부른다.
"엄마!"
어? 왜? 하면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뭔 일일까 했는데,
"겨울이 좀 봐."
하며 빙그레 웃는다. 웃고 있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니 고양이가 책가방에 쏙 들어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눈과 귀만 내놓은 모습이 예쁘다고 나를 부른 것이다. 나는 덩달아 웃으면서 ‘아유, 귀여워’ 했는데 신발을 문질러 닦으면서 울컥, 눈이 촉촉해진다. 아들이 나를 이렇게 웃으며 부른 게 얼마만인가. 이렇게 먼저 말을 건 게 실로 오랜만이구나. 여행 다녀오길 진짜 잘했구나. 다녀온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나는 그저 아들이랑 이런 대화가 하고 싶었던 거다. 언제부턴가 아들이 먼저 말을 걸 때는, '나 오카리나 준비물인데'라든가 '내일 수학 학원 보강 있어' 같은 지시나 통보뿐이었다. 나도 숙제는 했어? 밥 뭐 먹을까 등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웃는 얼굴로 나를 다급하게 부르고 같이 그 순간을 즐기자고 한 아들이라니. 아들 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것 같다. 이런 걸 감각하는 나, 너무 예민한가? 그렇다 해도 이런 예민함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비록 여행 가서 첫날밤에 낯선 곳에서 잘 못 자고, 그다음 행선지를 찾아갈 생각에 그 순간을 100퍼센트 즐기지 못하는 나이지만, 이런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는 예민함이 내게 있다는 게 오늘은 정말 기쁘다. 또 그런 때가 찾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아들과의 관계 회복, 이제 드디어 진행되는 것 같다. 단둘이 한 여행이 우리 둘 다를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