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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Apr 29. 2024

중학생들만 이십 년째

중학생 아들 키우기는 쇼펜하우어와 함께

중학생들만 이십 년째. <오백 년째 열다섯>은 소설이지만 이 제목은 현실이다. 매일 같이 중학생들과 생활하다 보니 애들 표정만 봐도 불만이 가득한지 억울한지 알겠다. 작은아들 얼굴에서 중학생의 기운을 보았다. 그렇지, 얘도 중학생인데.

배에 힘을 주고 낮고 큰 목소리로 아들을 호통치는 밤이 있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 화가 났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늘 대답이 없다. 듣고도 답을 안 하는 거라면 나에 대한 불만일 테지만, 내가 지시하거나 안내한 것에 대해 엉뚱하게 대응하는 아들을 보면 듣기에 문제가 있는 것도 같다. 이런 식의 태도가 학교에서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쯤이야 술술 나열할 수가 있다. 오늘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마음먹고 줄기차게 옳은 말을 해댔다. 이렇게 끝냈다면 좋으련만, 토요일 아침 학원 보강 데려다주다 차에서 또 한 번 있는 힘껏 퍼부었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아들을 울린 채로 보내놓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중학생과 대화하기, 아니 중학생을 혼내던 경험이 이런 데서 발휘되는가 씁쓸했다.

시간이 흐른 뒤 아들과 우리가 서로에게 바라는 걸 적어보자고 했다. 종이를 반씩 접어서 내 것에는 ‘내가 바라는 엄마로서의 모습’과 ‘도빵이에게 바라는 점’을 아들 것에는 ‘내가 바라는 나’와 ‘엄마 아빠에게 바라는 점’을 써보자 했다. 나는 물론 이것저것 많이 썼다.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대화하는 엄마이고 싶다든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도 엄청 많지만 선별해 썼다. 대답하기, 자기 물건 소중히 다루기, 인사하기 등등. 그런데 아들은 딱 하나씩만 썼다. 자신에 대해서는 핸드폰 적당히 사용하기. (스마트폰 중독 관련 진단에서 ‘주의’가 나왔다. 상담을 받겠느냐는 안내 문자와 함께.) 부모에게 바라는 건, 머리 자르라 하지 않기. 그게 다였다. 바라는 게 별로 없구나. 나는 많은데. 갑자기 쇼펜하우어 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함께하기와 거리 두기의 지혜였던가. 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아직도 상대를 바꾸려고 하다니, 왜 내 배움은 늘 제자리인가.


독서모임 책으로 읽게 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펼치면서 큰 기대는 없었다. 어렵지 않았고, 실용적인 글이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철학서라기보다는 자기 계발서 같이 뻔해서 처음 펼쳤을 땐 그저 그랬는데 웬걸 책을 덮고 나서 자꾸 생각나는 문장이 위로가 되었다. 이를 테면,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라든가 쾌락보다도 고통을 없애는 게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나를 달래주었다. 어떤 인생이든 괴롭다는 말이 주는 위로라니. 그렇게 마음이 열리자 중간부터는 읽으면서도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새길 수가 있었다. 아들을 떠올리며 읽던 챕터는 ‘인생의 무게중심을 밖에서 안으로 옮겨라‘와 ‘당신의 거리를 유지하라’라는 제목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았구나.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지난주에 4월 한 달간의 교생 실습을 마치는 간담회 자리에 참석했다. 물론 나는 이분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격이었다. 앳되고 열정적인 교생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만난 소회며 공개수업에 대한 평가와 교직에 대한 애정에 대해 나눠 주셨다. 참석한 부장님들의 칭찬과 조언이 곁들여졌고, '실습'이라는 점 탓에 저마다의 실수에 대해 말하다 보니 참석한 부장님들 또한 신규 때의 기억들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덧붙였다.

첫해에 국어 말고 창체시간을 한 학기 한 반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지만 안 통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를 따로 불러다가 왜 이렇게 수업에 참여하지 않느냐 왜 자꾸 내 말을 듣지 않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선생님이 싫어서요."

나는 아직도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눈을 반짝이던 여자애를 떠올릴 수 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당돌했는지도. 그 아이보다도 나는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대화를 마치고 돌려보낸 후 화장실에 가서 울었던 기억. 학생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게 분했다. 난생처음으로 눈앞에서 네가 싫다는 얘길 듣다니, 그걸 학생에게서,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만약 지금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래? 그건 네 사정이고.'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하고 단호히 말하며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읊어댈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따져보자면 경력이나 대화 기술 향상 등을 갖다댈 수 있겠지만, 핵심은 거리 조절이 아닐까? 신규 교사일 때에는 학생과의 거리 조절이 안 된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는 해마다 신규 엄마인 것만 같다. 초 5의 엄마, 중 1의 엄마 역할을 해마다 새롭게 해야 하므로. 고등학생이 된 큰아들과 중학생 둘째 또한 차이가 커서 중학교 학부모를 3년 했다는 걸로는 감당이 안 된다. 우리 둘째 도빵이의 단순함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축구공을 차는 아이를 인정해야 할 때다. 쇼펜하우어의 거리두기 부분에 소개된 고사성어가 너무 와닿았다.

"불견상견절치(不見想見切齒);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 갈린다."

딱 우리 아들 얘기다.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나 너무 궁금하고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성실한 모습일까 불안한데, 막상 눈앞에 있는 아들은 나를 부글부글하게 만든다. 차라리 축구하러 나가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하다. 이 부분에 굵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마라"

"함께하기와 거리 두기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들을 키우는 데에는, 특히 중학생 아들을 키울 때에는 쇼펜하우어의 책 정도는 옆에 끼고 살아야 하는 법. 내게 주어진 고통을 받아들이고, 상처 주거나 받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거리를 지켜야겠다. 신규 때 만난 학생이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다니. 교생 실습 간담회 때 저 이야기를 꺼내놓자 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걔가 질투했네' 헛, 그랬었나? 먼 기억을 이렇게 미화시켜 주시는 분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질투하는 여학생들은 만날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그들을 질투한다. 때때로 만나는 훌륭한 중학생들과 그 어머니들을 말이다. 물론 그 대상은 극히 드물며, 그런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들에게도 나도 모르는 갈등이 있겠지, 하며 나를 달래련다.

강용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유노북스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은 고독과 관련한 부분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개성을 전개하는 삶을 누리려면 고독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아아, 그렇지만 저는 이십 년째 중학생들과 생활한다고요. 중학생과 함께 있으면 도저히 혼자 지내기가 힘들답니다. 다시 또 인생은 고통이라는 명제가 떠오르면서 고통과 고독 사이에서 고독을 사수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아들과의 거리를 멀찍이 떼어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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