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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Aug 04. 2024

엄마를 키우는 아들

아들은 잘하고 있다, 엄마를 독립 시키기 위해

"8시 58분이야."

9시까지 학원에 가야 하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가 말려줘?"

핸드폰을 보며 오랫동안 드라이를 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 구체적인 문장은 아닌데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그 말투와 표정, 아니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다. 머리를 말리는 채로 발을 구르고 하는 동작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쁨. 중학생 아들이 가끔 이럴 때마다 기분이 팍 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줄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 이 장면에서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아들에게 말을 건 자체가 잘못인가? 아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학원 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뭘 잘못했느냐, 그럴 때 엄마는 많이 속상하다, 네가 다른 데 가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닌 거 알지만 엄마한테도 예의를 지켜라, 엄마나 선생님이나 사람이다, 힘을 빼고 말했다.


학원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데리러 가서도 별 말을 안 했다. 수고했어, 한 마디. 평소 같았으면 나는 하늘이 예쁘다느니, 이따가 엄마랑 빙수 먹으러 갈까 등 일방적으로 말을 붙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때마다 아들의 반응은 두 가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 혹은 ’싫은데.‘

집에 와서 점심을 해 먹였다. 치우고서는

"오늘은 나갈 수 없을 거야, 폭염 재난 문자 받았지?"

확인했다. 주말마다 축구하러 나가는 게 아들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 더위에 쓰러지는 일 없이 집에서 근신시키고 싶었다. 그래놓고

"엄마는 나갔다 올게"

했다. 행선지도 밝히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겠지.

동네 책방으로 향했다. 아들과 같이 있지 않으려고 '버찌책방'에 가는 일이 한 번씩 있다. 안정을 주는 공간이라 편안하고, 기분 좋은 설렘을 주는 데라 든든하다. 책을 보고 읽고 커피를 마시고 책방지기 버찌님과 대화를 나눴다. 책 이야기 끝에 아들 이야기가 빠질 수 없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책방지기님이 말한다. 그래도 아들이 엄마한테 표현한다는 점은 괜찮지 않냐고. 맞다, 그렇다.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향모를 땋으며>의 콩줄기와 옥수숫대의 공생 부분을 읽다가 얻은 깨달음. 사춘기 아이들이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자기를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부모나 선생님을 가늠하는 일. 우리 둘째 도빵이가 지금 그러고 있구나. 나는 얼마만큼 받아들여지는 사람일지, 더불어 내가 지켜야 하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있구나.

3년 전 아들들을 데리고 상담을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둘째더러 공격성을 표현해야 한다던 상담 선생님 말씀. 아이는 그걸 나한테 휘두르고 있는 걸까? 밖에서는 안 그러고, 안전한 공간인 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인 나에게 한다는 건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은 점이다. 나를 돌아보면 나는 누구에게도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상담을 다니려고 마음먹은 것도, 나의 그런 성향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을까 봐 두려워서였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기, 자기감정에 솔직하기.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 반에서 내가 감정적으로 불편했던 아이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학생이었다. 왜 저 애를 볼 때마다 불편하고 흥분이 될까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나는 내 부정적인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가 싫어할까 봐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는데, 저 애는 그러지 않아서 내 마음이 요동쳤던 거다. 그 인식 후에는 아이를 대하는 게 더 너그러워졌다. 덕분에 아이와의 관계도, 아이의 마음도 훨씬 편해졌다.

이제 우리 아들에 대해 내가 새로이 인식할 차례다. 버찌 님 덕분에 내가 말하고 듣고 보는 것을 사고로 인식할 수 있었다. 맞아, 얘가 밖에서는 잘 안 그러는데 나한테는 '표현'을 하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 도빵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얘도 밖에 나가서는 자기표현을 많이 못 하는 소극적이고 부끄럼이 많은 아이라는 걸 안다. 그런 아이가 집에서라도 편안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걸 나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자기를 드러내다 보면 사회에서도 해야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 수 있겠지. 그럼에도 나는 또 가르쳐야 할 거다. 어떤 언행은 가능하지만 어떤 행동은 나도 힘들다고, 선을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머리 자르라는 말만 하지 말라던 아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화장실에서 머리칼을 스스로 자른다. 욕실을 정리하다가 머리카락 뭉텅이를 보고 놀란다. 좀 치워서 내가 모르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도 티를 낸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난다. <글 쓰는 딸들>에서 사춘기 무렵 거울을 자주 보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설정해 나가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중 3이던 큰아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씽긋 웃던 일을 그에 맞추어 썼더랬다. 우리 도빵이도 가장 나은 자기 본모습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가위질을 하나보다.

아이가 둘이면 둘째는 좀 수월하게 키우는 줄 알았는데 첫째 때의 고민을 둘째 때 새로이 한다. 그 둘을 연결 짓지도 못하다가 오늘은 해본다. 전에 쓴 글, 글에 썼던 성찰을 또다시 한다. 전에 했던 고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렇게 새로고침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던가.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돌보는 기분이다. 또 하나,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다는 걸 몇 번이고 배운다.

아직 도빵이와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어제부터 말을 줄였는데 어쩜 아이는 잔소리가 줄었다고 좋아할 수도. 그렇다면 이건 나 혼자만의 복수, 아이에게는 추구미. 월요일에는 방학 중인 아이와 떨어져 지내려고 부산엘 다녀올 생각이다. 엄마의 독립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가 가장 좋아하겠지.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하는 걸 거다, 서로의 독립을 위해.


버찌 님이 찍어줌 :)



<향모를 땋으며>를 읽고 쓴 글 '십 대 시기 호르몬의 영향으로 방황하는 콩줄기', <글 쓰는 딸들>을 읽고 쓴 글 '사춘기 아이들이 자꾸 거울만 본다고요?'는 모두 작년에 냈던 책 <우주를 누비며 다정을 전하는 중>에 들어 있다. 7월에 부산의 독립서점 '주책공사'에서 입고요청을 해주셔서 몇 권 더 발행했다.(매우 감사드립니다.) 약간의 손을 보아 새로 받은 책을 '주책공사'와 '버찌책방'에 입고했다는 자랑으로 끝을 맺는다.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배웠거든요, 나대라!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에이도스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창비

@박주희, <우주를 누비며 다정을 전하는 중> - 관심 가져 주세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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