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잘하고 있다, 엄마를 독립 시키기 위해
"8시 58분이야."
9시까지 학원에 가야 하는, 머리를 말리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가 말려줘?"
핸드폰을 보며 오랫동안 드라이를 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 구체적인 문장은 아닌데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그 말투와 표정, 아니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다. 머리를 말리는 채로 발을 구르고 하는 동작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쁨. 중학생 아들이 가끔 이럴 때마다 기분이 팍 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줄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 이 장면에서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아들에게 말을 건 자체가 잘못인가? 아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학원 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뭘 잘못했느냐, 그럴 때 엄마는 많이 속상하다, 네가 다른 데 가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닌 거 알지만 엄마한테도 예의를 지켜라, 엄마나 선생님이나 사람이다, 힘을 빼고 말했다.
학원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데리러 가서도 별 말을 안 했다. 수고했어, 한 마디. 평소 같았으면 나는 하늘이 예쁘다느니, 이따가 엄마랑 빙수 먹으러 갈까 등 일방적으로 말을 붙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때마다 아들의 반응은 두 가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 혹은 ’싫은데.‘
집에 와서 점심을 해 먹였다. 치우고서는
"오늘은 나갈 수 없을 거야, 폭염 재난 문자 받았지?"
확인했다. 주말마다 축구하러 나가는 게 아들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 더위에 쓰러지는 일 없이 집에서 근신시키고 싶었다. 그래놓고
"엄마는 나갔다 올게"
했다. 행선지도 밝히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겠지.
동네 책방으로 향했다. 아들과 같이 있지 않으려고 '버찌책방'에 가는 일이 한 번씩 있다. 안정을 주는 공간이라 편안하고, 기분 좋은 설렘을 주는 데라 든든하다. 책을 보고 읽고 커피를 마시고 책방지기 버찌님과 대화를 나눴다. 책 이야기 끝에 아들 이야기가 빠질 수 없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책방지기님이 말한다. 그래도 아들이 엄마한테 표현한다는 점은 괜찮지 않냐고. 맞다, 그렇다.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향모를 땋으며>의 콩줄기와 옥수숫대의 공생 부분을 읽다가 얻은 깨달음. 사춘기 아이들이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자기를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부모나 선생님을 가늠하는 일. 우리 둘째 도빵이가 지금 그러고 있구나. 나는 얼마만큼 받아들여지는 사람일지, 더불어 내가 지켜야 하는 선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있구나.
3년 전 아들들을 데리고 상담을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둘째더러 공격성을 표현해야 한다던 상담 선생님 말씀. 아이는 그걸 나한테 휘두르고 있는 걸까? 밖에서는 안 그러고, 안전한 공간인 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인 나에게 한다는 건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은 점이다. 나를 돌아보면 나는 누구에게도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상담을 다니려고 마음먹은 것도, 나의 그런 성향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을까 봐 두려워서였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기, 자기감정에 솔직하기.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 반에서 내가 감정적으로 불편했던 아이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학생이었다. 왜 저 애를 볼 때마다 불편하고 흥분이 될까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나는 내 부정적인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가 싫어할까 봐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는데, 저 애는 그러지 않아서 내 마음이 요동쳤던 거다. 그 인식 후에는 아이를 대하는 게 더 너그러워졌다. 덕분에 아이와의 관계도, 아이의 마음도 훨씬 편해졌다.
이제 우리 아들에 대해 내가 새로이 인식할 차례다. 버찌 님 덕분에 내가 말하고 듣고 보는 것을 사고로 인식할 수 있었다. 맞아, 얘가 밖에서는 잘 안 그러는데 나한테는 '표현'을 하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 도빵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얘도 밖에 나가서는 자기표현을 많이 못 하는 소극적이고 부끄럼이 많은 아이라는 걸 안다. 그런 아이가 집에서라도 편안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걸 나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자기를 드러내다 보면 사회에서도 해야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살 수 있겠지. 그럼에도 나는 또 가르쳐야 할 거다. 어떤 언행은 가능하지만 어떤 행동은 나도 힘들다고, 선을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머리 자르라는 말만 하지 말라던 아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화장실에서 머리칼을 스스로 자른다. 욕실을 정리하다가 머리카락 뭉텅이를 보고 놀란다. 좀 치워서 내가 모르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도 티를 낸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예전에 쓴 글이 생각난다. <글 쓰는 딸들>에서 사춘기 무렵 거울을 자주 보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설정해 나가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중 3이던 큰아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씽긋 웃던 일을 그에 맞추어 썼더랬다. 우리 도빵이도 가장 나은 자기 본모습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가위질을 하나보다.
아이가 둘이면 둘째는 좀 수월하게 키우는 줄 알았는데 첫째 때의 고민을 둘째 때 새로이 한다. 그 둘을 연결 짓지도 못하다가 오늘은 해본다. 전에 쓴 글, 글에 썼던 성찰을 또다시 한다. 전에 했던 고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렇게 새로고침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던가.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돌보는 기분이다. 또 하나,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다는 걸 몇 번이고 배운다.
아직 도빵이와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어제부터 말을 줄였는데 어쩜 아이는 잔소리가 줄었다고 좋아할 수도. 그렇다면 이건 나 혼자만의 복수, 아이에게는 추구미. 월요일에는 방학 중인 아이와 떨어져 지내려고 부산엘 다녀올 생각이다. 엄마의 독립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가 가장 좋아하겠지.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하는 걸 거다, 서로의 독립을 위해.
<향모를 땋으며>를 읽고 쓴 글 '십 대 시기 호르몬의 영향으로 방황하는 콩줄기', <글 쓰는 딸들>을 읽고 쓴 글 '사춘기 아이들이 자꾸 거울만 본다고요?'는 모두 작년에 냈던 책 <우주를 누비며 다정을 전하는 중>에 들어 있다. 7월에 부산의 독립서점 '주책공사'에서 입고요청을 해주셔서 몇 권 더 발행했다.(매우 감사드립니다.) 약간의 손을 보아 새로 받은 책을 '주책공사'와 '버찌책방'에 입고했다는 자랑으로 끝을 맺는다.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배웠거든요, 나대라!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에이도스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창비
@박주희, <우주를 누비며 다정을 전하는 중> - 관심 가져 주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