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책 속 아이가 가련하여, 내 옆에 있는 아이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by 조이아


어린이들 덕분에 한 나절 예술활동을 했다. 아침부터 내게 스케치북을 들이밀며 "엄마, 젠탱글 같이 하자." 하는 둘째. 젠탱글에 재미를 붙이던 게 나는 삼 년 전이었는데, 아이는 지난주 미술학원에서 멋진 개의 프로필을 등분하여 젠탱글을 해오더니 다시 하고 싶었나 보다.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걸 자를 대고 해야 하냐며 나를 찾는다. 탁자에 모여 앉아 어디서부터 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자기는 못 한다며 자꾸 나더러 그리라고 요구하는 아이에게 나처럼 해보라며 몇 가지 패턴을 따라 하게 했다. 큰아이는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자기 공책에 파라오의 눈을 큼직하게 그린다. 작은 아이의 동그라미는 다양한 패턴으로 가장자리부터 채워지고, 큰 아이의 파라오 눈 윤곽선은 멋지게 완성되었다. 감탄하는 내게 선심 쓰듯 "엄마, 가져." 하는 큰아이. 그 선물은 젠탱글을 완성하라는 명령인지 부탁인지와 함께 왔고, 파라오의 눈을 채우는 것은 그대로 나의 숙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칭찬을 잘하는지, 나는 젠탱글을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린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참 좋다. 방학이라 여유롭고,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내게 자꾸 이야기를 들려주고 무언가를 물어본다. 오늘 아침에는 왜 이리 할 말이 많은지, 참 하찮고 쓸데없는 것들인데 본인들은 사뭇 진지하다. 어벤저스 무기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대꾸하면서 '내가 이런 유치한 얘기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되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곧 이런 시간이 그리워지리라는 예감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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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자기 전에 나란히 누워서 얘기할 때였다. 큰아이가 동생더러 'ㅇㅇ커플'이라며 놀리는 말을 하더니, 곧 내게 '커플'이 뭐냐고 묻는다. 자기가 말한 건데도 뜻을 정확히 모르고 쓴 것이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럼 자기랑 동생도 커플이냔다. 엄마랑 자기도. "어어, 그건 아니고. 짝꿍이라는 건데." 내 대답이 궁색해진다. 요즈음엔 동성커플도 있고 한데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하기도 싫고, 결혼한 이들도 커플이고 그렇지 않은 커플도 많은데 하는 복잡한 생각과 함께, "서로 '사귀자'고 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더니, "엄마, 그럼 친구랑 말하고 노는 걸 좋아 해서 친구랑 자주 얘기를 하는데 그 친구가 여자면, 그게 여자친구야?" 묻는다. "여자친구랑 얘기한다고 다 사귀는 건 아니지." 했더니, 이제 '사귀다'에 대해 묻는다. 이 또한 쉽지 않다. 친구 간의 사귐과는 다른 사귐이구나.

'커플'과 '사귀다'에 대한 정의는 내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했다. "근데 반에 사귀는 친구들 있어?" 듣고 있던 둘째가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딨어?" 하며 킬킬댔다. 내가 '또 모르지~'라고 말하려는 찰나 첫째 왈, "우리는 사춘기라서 사귀는 애들이 있을 수도 있어."라고 하는 거다.

입으로는 "그러엄~"을 내뱉으며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좀 복잡해졌다. 일단은 아이들이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더 천천히 대답하고, 아이들이 말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의 반응들로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두 번째로 큰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춘기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놀람도 컸다. 십 대가 된 자신을 이해하고 있나 하는 의문과 12월 31일 생인 아이에 비해 또래 아이들은 얼마나 성숙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세 번째로는 금세 내가 아이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할 때가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답 못 할 세상일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은 '커플'이지만 그 커플에 대한 내 생각도 잘 정리되지 않아 중언부언 설명하고 있는데. 그리고 더욱 나를 두렵게 한 생각은, '곧 있으면 이 아이들이 내게 입을 다물 때가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지금 내 몸은 아이 둘 사이에 누워있지만 이제 곧 이런 날도 얼마 안 남았을 거라는 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밤마다 아이 둘 사이에 눕는 것을 꺼리며 '이제 너희끼리 자'라며 자꾸만 일어나 책을 펼치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에게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그렇지' 영혼 없는 반응을 보인다. 요즘 들어 5학년이나 된 아들이 자꾸 내게 안기고 하트를 날려서 '쟤가 왜 저러나'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책 속 어린아이가 가련하여, 내 옆에 있는 아이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이제 곧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외출 후에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거나, 어쩌면 밥 먹는 정수리만 보일지도 모르는 남자아이들.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뽀뽀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런 다짐도 무색하게 아이들은 집 안에서 모자를 쓰고, 총대를 매고, 줄 맞춰 행렬하고 있다. (5학년과 2학년이 함께 놀면서 2학년 수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캡틴아메리카 방패를 만들어 노는 아이들을 웃으면서 바라본다. 이런 풍경을 아직 좀 더 볼 수 있겠다 안심하며.

저 둘이 커플이 안 될 건 또 뭐냐. 엄마 아빠보다 사랑한다며 둘이 죽고 못 사는데, 그럼 커플인 거지. 아이들이 내게 단어의 정의를 새로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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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이해인 님의 <나를 키우는 말>의 마지막 연을 다시 쓴 것이다.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