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수첩과 함께 일상을 여행처럼
5월 초 4일간의 연휴 동안 네 군데의 서점엘 갔다. ‘오케이 슬로울리’에서 감각적인 도서와 문구를 구경하고, 오랜만에 공간을 누리고 싶어서 ‘한쪽가게’를 찾았다. 큰아들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갔고, 다음 날엔 독립영화를 한 편 보고 그 근처 서점인 ‘다다르다’를 들르지 않을 수 없어서 방문했다. 마지막 다다르다의 경우 영수증 일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정말 오랜만에 기다란 영수증을 받았다. 버릴 수 없는 귀한 편지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대전의 서점에는 이런 영수증을 주는 서점이 꽤 있다. 오케이 슬로울리에서는 추천 문장이 쓰인 영수증을 준다. 늘 가던 곳인 버찌책방에서 오랜만에 영수증을 받고 보니, 하단에 이번 주 추천 도서가 쓰였다. 티켓이 생기거나 카드, 엽서 등을 받을 때 붙여두는 수첩에 붙여두었다. 어느새 두툼해진 수첩을 보니 여행 수첩이 생각난다.
모아둔 일기장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일기가 있다면 여행 일기다. 이십 년 전 친구와 했던 20일간의 유럽 여행 때 노트 한 권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여행노트로 기획된 단행본처럼 생긴 노트(책등이 있다)였는데 구입하곤 여행 계획(어쩌면 가장 신나는 순간이다)할 때부터 작성했다. 여행을 위해 읽은 책이며, 호텔 예약 건, 여행 일정 등을 빼곡히 기록했다. 여행지에서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숙소, 카페, 식당 등에서 일기를 쓰고 미술관 티켓, 버스표, 식당 영수증 등을 그때그때 붙였다. 하이테크 펜으로 자잘하게 글씨를 쓰고 그림 실력은 없어도 건축물 그림도 곁들였더랬다.(이렇게 한 권을 썼다니 혼자 간 여행인가 싶겠지만, 함께 한 친구도 국어교사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 그렇게 한 권에 내 감상을 적고, 여정을 쓰며 티켓이나 영수증 등을 붙였던 게 나를 쓰는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닌가 싶다. 한 권을 완성하는 일을 이십 년 전에도 했었구나. 그 기억이 좋아 여행할 때 수첩 한 권을 준비할 때가 있다. 몇 해 전 속초 여행에서는 방문지에 대한 소감, 식당 이름 등을 얇은 수첩에 썼다. 여행 다녀오자마자 티켓과 함께 사진 몇 장을 작은 크기로 인화해 붙였더니 한 권짜리 여행기가 되었다. 어느 겨울 경주에 갔을 때엔 수첩 대신 고명재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들고 다니며, 짧은 소회며 식당, 카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팟빵 ‘일기떨기’ 소진 편집자 님을 따라 시집에 기록해 보았는데 막상 시가 쓰인 곳엔 못 쓰겠더라.— 그 기록들을 펼치면 여행지의 풍경이 그때 공기의 습도라든가 온도 같은 것과 함께 펼쳐지고, 그시절 어린 아들들의 웃음까지 보이는 듯하다. 유럽 여행 일기를 열면 그때입고 다니던 옷도 생각나고, 작은 크로스백에 이 두툼한 수첩과 딱풀, 필기도구 등을 챙겨 다니던 이십 대의 나도 느껴지며, 프랑스어로 메뉴를 적어주며 영어로 설명하던 인상 좋은 음식점 주인도 그려진다. 이러니 기록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 힘을 지녔는지.
기록을 하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여행기는 나의 일상을 살아갈 힘을 준다. 그런데 꼭 여행지의 기록만 특별한가? 내가 쓰고 있는 스케줄러는 트래블러스팩토리에서 만든 만년 다이어리다. 마침 버찌책방에서 트래블러스팩토리 본점에서만 찍을 수 있는 도장의 스탬프카라반을 진행한다고 하여, 스케줄러 여기저기에 도장을 찍었다. 여행과 관련된 크기와 색이 다른 도장들이 멋있었다. 그렇게 ‘Via air mail’이라든가 ‘Have a nice trip’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처음엔 내 다이어리에 어울리지 않나 싶다가, 여행일기와 일상 다이어리가 달라야 하나 같으면 왜 안 되는 걸까 싶어 졌고, 내가 오래도록 여행자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고양이와 함께 살며 여행을 꿈꾸기 어려운 지금, 내 일상 또한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진다. (이 회사는 어쩌면 이름도 ‘traveler’s factory’일까. 스케줄러나 무지 수첩, 도장이며 각종 문구를 예쁘게 만드는 미도리는 참 네이밍마저 절묘하구나.)
영수증에서 시작해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행지에서는 영수증 하나도 특별하다. 내 일상을 이루는 다양한 기록거리들 또한 특별한 기억으로 기록되면 좋겠다. 스케줄러에 찍힌 여행에 관한 도장처럼, 내 일기장엔 그날의 특별한 기억들을 소중히 쓰고 붙여나가야지. 그럼 내 일상은 여행이 될 것이다. 반려동물,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요즘, 내가 늘 함께 하고 싶은 반려대상은 여행자의 마음이라고 선언해 본다. 어디든 반려수첩을 데리고 다니며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