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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마음 회복은 문학으로부터

학년말 닫힌 마음 가운데 열린 마음 발견하기

by 조이아

기말고사도 모두 끝난 중학교 3학년 수업. 교실에 가면 “오늘 뭐 해요?”라고 묻는 학생들이 꼭 있다. 궁금해서 묻는 아이에게는 신나서 대답하지만, 공부는 싫다는 듯이 묻는 질문에는 마음이 무뎌지지가 않는다.

둘이 나눠 들어가는 국어 수업에 선배 선생님이 문법을 정리해 주신다고 하셔서 자연스레 문학을 맡았다. 지적인 욕구가 높은 아이들 수준에 맞추어 고전 문학을 소개한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즐겁다는 거다. 아이들 앞에서 책 소개, 작가 이야기 하는 게 신난다.

교양 높이는 시간을 제목으로 한 권의 책 혹은 한 사람의 저자에 대해 알아본다. A4 용지 절반 크기 학습지를 준비해 메모하게 하고 소감을 쓰게 한다. 읽기 자료를 가져가 함께 읽는다. <멋진 신세계>의 앞부분, 백석 시인의 시 몇 편, 박완서 작가님의 수필 한 편, 헤밍웨이의 단편 등.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 보기로 제공되는 일부분이라도 문체나 소설의 세계관 등을 맛볼 수 있다. 그럼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누구인지, 백석 시인의 시집을 필사한 시인이 누구인지 등을 알게 된다.


학년말 수업이라고 하는 건 말이다. 참 기대 대로 되질 않는다. 시험도 끝나고 지난 주로 출결 마감도 끝났다. 그러니 준비해 간 수업은 집중률이 낮다. 평소 열심히 하던 아이인데도 당당하게 다른 과목 문제를 풀고 있고, 수업 시작부터 엎드려 있다. 그 한 명 한 명이 다 눈에 들어오면서 내 본질을 흐릿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학년말인 이때가 교사에게는 가장 바쁜 시기다. 학교생활기록부 작성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이 아이들의 고입 원서 작성이 코앞. 국제고, 전국 단위 자사고며 지역의 자사고 등 학교별로 챙길 원서며 서류, 다른 날짜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틈틈이 자기소개서 내용이며 띄어쓰기마저도 봐주고 있다. 이 와중에 조퇴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학생들로 쉬는 시간도 분주하다.

멘탈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의지라고 해야 하나. 정신줄이 딱이겠다.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내 입에서 나오는 건 불평과 불만뿐일 거다. ‘아직도 학교를 안 정한 거야? 자소서 써오라는데 왜 안 써오지? 고등학교는 내가 가냐! 어머니, 원서 쓸 때 현체라니요, 가정학습 없어진 지 꽤 되었습니다, 현체 비행기표 첨부해 주세요 일주일 째입니다‘ 등등. 끝도 없이 새어나갈 불만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붙잡아 줄 중심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수업, 아니 문학이다.

이 시는 내가 읽겠다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낭송하며 혼자 감동하고, 소리꾼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를 보여줄 때마다 그 멋짐에 전율한다. <멋진 신세계>가 쓰인 년도를 들먹이며 이런 세계관을 만들었다니 감탄하고, 열아홉 살 메리 셸리가 만든 작품의 의의,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를 운운하며 눈빛을 교환한다.


이번 주말, 일주일에 한 편 글쓰기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수업 준비를 위해 바삐 콘텐츠를 챙겨 보느라 그랬다. 집에 <프랑켄슈타인>이 없길래(빌려준 모양이다) 이번에 만들어졌다는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았다. 결말의 재해석이 아름다워 사무쳤다. 도서관에서 헤밍웨이의 책을 빌려와 <노인과 바다>도 근 삼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 과연 아름다워서 눈물과 동반 감상했다.(수업과 관련 없지만 <위키드 2>도 보고 그 음악을 찾아 듣고 하느라 주말이 금방 지나갔다. 주말에 집중해 감동 백신을 맞아두어야 주중을 견딜 수 있다.)


“매일이 새로운 하루잖아. 운도 중요하지만 정확하게 하는 것도 중요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맞을 수 있지.”


<노인과 바다> 속 문장이다. 노인이 정확하게 하는 건 낚싯줄을 곧게 유지해 미끼를 정확한 깊이에 놓는 일. 내가 정확하게 하는 일은 수업을 지키는 일인 것 같다. 그래야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감정적인 반응을 통 보여주지 않는 반에서 나올 때면 복도에서 한숨을 쉬지만, 몇 명이라도 내 얘기에 귀 기울이고 몸을 빼서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이는 반에서는 기운이 들어찬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한 명이라도 안 듣는 반은 없어 다행이지. 조용히 감지하는 그 기운들을 긁어모아 준비해 간 수업을 나눈다. 학생들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학생들 마음을 겨냥하여 인문학에 대한 관심 갖게 하기. 너무 큰 목표인가. 하지만 내 확실한 목표임은 분명하다. <노인과 바다>에서 운이라 함은, 커다란 물고기를 낚는 일이겠으나 내게 행운은 학생들과의 깊은 교감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저 책 읽고 싶다, 저 사람이 궁금하다 하고 마음을 일으키는 일. 읽기, 쓰기에 마음 열게 하는 일. 그런 기적 같은 일을 여전히 꿈꾼다.


10분 남겨서 독서 시간을 주었는데, “선생님은 뭐 읽으세요?” 묻는 아이가 있었다. 그럼 또 나는 신나서 말한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노벨 문학상 받은 오르한 파묵이라는 튀르키예 작가가 쓴 건데. 세밀화가가 말이야…….










첫문장에 공감하며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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