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비발디의 사계가 이렇게 나를 울릴 줄이야. 마리안이 엘로이즈에게 음악이 어떤 건지 설명할 때 직접 연주하며 들려주던 하프시코드의 선율은 미숙했지만, 영화가 끝나기 전 흐르는 사계 여름 3악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눈을 촉촉하게 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음악은 단 두 곡만 흐른다. 그래서 더더욱 와 닿는데, 그것도 정확히 두 번씩 들려온다. 첫 번째는 연약하고 조심스럽지만, 두 번째는 가슴을 가득 채우고 감정을 흘러넘치게 한다.
한 곡은 비발디 여름 3악장으로 마리안이 엘로이즈에게 음악이 어떤 건지 설명할 때 흰 천으로 덮여 있던 하프시코드로 처음 등장한다. 천 위로 건반을 누르던 마리안은 조심스럽지만 천을 확 걷어내는 엘로이즈의 욕망은 더 강렬해 보인다. 머릿속 선율을 재현해내는 마리안은 서툴게 음악이 주는 느낌을 설명한다. 미숙한 연주는 두 사람의 관계와도 같고 폭풍우가 치기 전의 느낌은 곧 닥칠 둘의 모습처럼 아슬아슬하다.
결혼할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마리안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산책 친구로 가장하고 몰래 그를 관찰하여 그림을 그린다.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그 눈빛에,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을 의식하며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상대를 그리려면 일단 그를 알아야 하고,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고(동물학자 최재천 박사님이 말씀하셨다는 걸 쓰기엔 너무 동물적인가.) 하지 않나. 탐색의 눈빛을 넘은 감정이 넘나 든다.
그들이 주고받은 눈빛에 대해 쓰다 보면 줄거리를 너무 밝히게 될 것 같다.
영화는 프랑스 북서부 브리타니 지방의 섬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데, 두 번째 노래는 이 지역의 일하는 여성들이 모인 밤에 부르는 민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다가 각각의 음성이 합해지고, 시작되면서 들리는 음악은 매우 원시적이면서도 에너지를 준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시선은 어찌나 강렬한지.
작품에서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도 두 번 등장한다. 처음은 엘로이즈가 일하는 여인 소피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분에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부터 이승으로 데려가는 바로 그곳 말이다. 오르페우스가 뒤쫓아 오는 에우리디케의 안위를 걱정하며 뒤를 돌아봐 다시 저승에 가게 된 에우리디케 이야기에 소피는 화를 낸다. 엘로이즈는 다시 한번 뒷부분을 읽어주고 마리안과 함께 그 결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고. 오르페우스가 자기 위치를 생각해서 돌아본 것일 수도 있다고. 그 이야기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닮았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 두 사람은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초상화 그리기를 마치고 예정되어 있는 두 사람의 이별 직전, 엘로이즈는 흰 드레스를 입고 문 앞에서 막 나가려는 마리안에게 "나를 돌아봐"라 말한다. 마지막으로 각인된 그의 모습이 마리안의 머릿속엔 선명할 것이다.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 듯이. 그리고 이 모습은 마리안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속에 영원히 남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했다고 하는 마리안의 그림 속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는 두 사람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별 후에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두 번 보았다고 한다. 한 번은 마리안의 초상화를 통해서다. 그림에는 귀여운 아들과 엘로이즈가 책을 손에 든 채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의 손이 짚고 있는 28쪽을 발견하고 극장에서 소리 내어 감탄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비발디의 여름 3악장이 연주되는 음악홀에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엘로이즈의 모습은 어떤가. 아직도 기억하다 못해 여전한 감정의 떨림과 열정과 사랑이 마구 표현되어 나도 그와 같이 숨을 헐떡이는 것 같았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아마 단 두 차례의 음악 때문에 음악의 중요성이 더 부각된 것 같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여성들의 민요는,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란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소피를 비롯한 다른 여성들이 여전히 우리 옆에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피가 낙태한 후 그를 돌봐준다거나, 혹은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자고 한다거나, 엘로이즈 어머니의 외로움에 공감한다거나 하는 장면 장면들이 여성의 연대를 품고 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이루어낸 따스한 정서를 감상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