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속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

by 조이아

"잘못 쓰셨네요."

"아, 네, 제가 오늘 좀......."

이미 저울에 올릴 때부터, 아니 쓰자마자 잘못 쓴 걸 알았다. 그렇지만 딱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택배 부치려고요."

하며 직원분께 건넨 것이다. 상자에 받는 사람 주소를 상단에 쓰고 말았다. 창피했다. 무슨 정신인지. 아까 그 할아버지 때문이다. 이 시간에 나오지 말 걸, 아까 길을 건널 걸, 못 들은 척할 걸, 바쁘다 하고 지나칠 걸 하는 소리들이 내 안에서 아우성쳤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소를 새로 썼다. 값을 치르고 나와 걸었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바람은 불고, 하늘은 회색빛이다. 스산한 기운에 몸도 으스스 추워지는 기분이다.



"핸드폰 있으면 빌려줘요."

발음도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또 내 손엔 핸드폰이 들려있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말임이 분명했다.

"네? 핸드폰요?"

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요즘이 어느 시댄데 핸드폰을 빌릴까. 거동이 편치 않은 듯한, 그렇다고 정정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할아버지였다. 어떤 공단에서 온 듯한 편지봉투 하나에는 전화번호가 두어 개가 흘려 써있었다. 급한 일일까. 이 동네는 왜 이래. 이미 하교한 여학생 둘이 나를 흘깃 보고 지나간다.

할아버지의 텅 빈 것도 같고 청색으로 빛나는 것 같기도 한 눈동자가 강렬했다. 그 자리에 선 내게, 할아버지는 낮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번호를 부른다.

"공일공..."

나는 얼떨결에 번호를 따라 읽어가며 그 번호를 눌렀다. 번호를 다시 불러드려 확인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금세 '00:00'이라는 표시가 뜬다.

"받으셨어요."

하며 내 전화를 건넨다. 이 전화를 들고 다른 데로 가시진 않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마스크도 안 하셨다. 아이고, 요즘이 어느 시댄데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살균물티슈로 소독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통화 내용을 안 들을 수가 없다.

"거기가 어디요?"

엥? 어딘지도 모르고 전화를 하신 걸까. 두어 번 같은 말씀을 하시다가 아니라며 다시 전화를 돌려주시더니, 이내 번호를 부르신다. 아무리 숫자에 약한 나라지만 불러주시는 번호가 아까 그 번호임은 알겠다.

"아까 거신 덴데요?"

하고 다시 번호를 확인했다. 그래도 그 번호를 대는 분께 다시 통화 버튼을 눌러드리고 전화를 건넸다. 이번에도 소득 없이 내 손으로 온 전화기에 빨간 버튼을 눌러 통화 종료를 했다.

할아버지가 들고 계신 봉투 아래에는 어떤 금융기관 같은 데서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 장부가 한 권. 이번에는 그 노트를 펼치시더니 페이지 가득 전화번호가 쓰여있는 데를 들여다보신다. 봉투에 있던, 알아보기 힘든 숫자들과는 달리 꽤 정갈한 글씨였다. 나는 어디, 이 분 아는 사람 안 계신가 좌우를 살피기도 하고, 이제 가보겠다고 해야 할까 난감해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공일공..."

을 다시 부르신다. 눈썰미로 당신이 부르신 번호를 다시 살피며,

"여기 이 번호요? 0000인데요?"

잘못 부르신 번호 뒷자리를 내가 다시 불러드린다. 번호를 확인하고 초록색 통화 버튼. 이번에는 응답 시간이 조금 길다. 빨간색과 청색으로 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점퍼가 눈에 띈다. 머리칼도 깔끔한 편이다. '00:00'. 건넨다.

"여보세요. 나 죽겠다. 죽겠다고."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내가 어떤 일에 가담하게 된 건가. 듣자 하니 아들인가 보다.

"숨이 안 쉬어져. "

"죽겠어서 병원 가려고."

"니 엄마 번호는? 바뀌었어?"

받아 적을 것도 없는데, 번호를 외워야 되나 속으로 고민한다.

"지나가는 사람."

"핸드폰이 없어서."

"죽겠어."

이렇게 이어지는 소리를 나는 듣고만 있는다. 숨은 잘 쉬시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잘 나오셔서 잘 서 계신데 그러신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내게 건네진 전화,

"여보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거기 맨션 앞인가요?"

"네."

나는 상대가 무슨 부탁이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죄송하지만, "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나더러 어디 병원이라도 모셔다 달라는 건가?

"다시 바꿔주시겠어요?"

나는 크게 안심하고 대답과 동시에 전화를 건넸다. 어느새 할아버지가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내게 건네신다.

"아니에요."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오는 그 손을 나는 거부한다.

"괜찮습니다. 빨리 받으세요."

하고 나는 통화를 재촉했다.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린 것 같아 속으로 흠칫 놀랐다.

"죽겠다. 숨이 안 쉬어져. 병원 갈라고."

하는 소리를 잇더니 또다시 아내분의 전화번호를 묻고

"들어가."

를 여러 번, 마지막에는 큰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주위에서 이상하게 볼까 봐 걱정스럽다. 내게 건네진 핸드폰을 받고 안심한 내게

"고마워요."

라 말씀하셔서 나는 얼른

"네."

하고 돌아섰다. 너무 무정한가? 십 분이 채 안 되었을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던 태권도 차량 안의 어린이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쪽을 지나 우체국으로 걷다 보니 차량 바로 뒤에는 사범님인지 관장님인지가 서계시고 지나가는 나를 주시한다. 뭐야, 이 기분.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모른 척하며 걷는다.


늘 차로 출퇴근하던 길의 골목에 들어서니 왠지 멀리 낯선 데에 온 것 같다. 처음 가는 이 동네 우체국, 지도 앱도 켜보고 언덕을 오르내리니 몇백 미터 안 되는 거리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짙은 회색이 연상되는 길을 걷는 내내 할아버지의 텅 빈 것 같은, 조금 푸르스름하기까지 했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 눈동자가 주욱 나를 쫓아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은 무엇인가. 마음이 무거웠다. 혼자 지내는 노인의 삶과 그를 힘겨워하는 부양가족. 거기에 더불어 내게 갑작스레 책임 지워지면 어쩌나 하는 나의 얄팍한 우려까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내가 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런 거면 어떡하지? 나한테 무거운 책임이 떨어질 그 시간들을 나는 그 잠깐 사이에 상상했던 것이다.


얼마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생의 속살을 보아버린 기분이다. 아직은 보지 않았어도 되었을, 삶의 진실 한 조각. 내게 있는 줄 몰랐던, 인간의 이기심.






낯선 번호다. 받았더니 한참 이따가 들리는 아버지 목소리.

"나 죽겠다."

모셔다 드린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이렇게 전화가 오는 건지.

"네? 왜 그러세요? 핸드폰은 어디 두셨어요?"

하나씩 물어야 했다. 또 어떤 정신으로 전화를 하신 건지 속이 아려온다. 여전히 숨을 쉴 수 없다 하신다. 또 엄마를 찾으신다.

어머니가 가신 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아버지는 늘 엄마를 찾는다. 그나마 정신이 좀 돌아왔다 싶으면,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는 내 제안에 아버지는 냉큼

"그래, 니 엄마한테 가자."

하신다. 언제부터 이렇게 로맨티스트셨던가. 나는 자주 속이 쓰리다.

이 전화번호의 여자는 무슨 일인가.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아들을 속으로 욕했겠지 싶다. 사과 전화를 하는 건 더 큰 실례겠지. 내일 또 보러 갈 아버지에게 핸드폰 걸이라도 갖다 드려야겠다.




@ 그림은 무루 작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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