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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May 09. 2021

밀려오는 페이지에 부드럽게 젖어 떠내려 가기

시로 소통하기, 주민현 <서핑>


 중3 학생들과 시로 소통하는 활동을 준비하는 중에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를 만났다. 문학동네에서 <우리는 시를 사랑해> 메일을 받고 있는데 두 번째 편지는 김연수 작가님의 글이었다. 주민현 시인의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에 담긴 시를 읽을 수 있었다.



 <서핑>              

                                                            주민현


날씨가 좋아서 우리는 멀리까지 가기로 했다

발밑에 부드럽게 밀려오는 페이지를 보고 있다

바다 저편에서 파도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누가 슬프거나 기쁘거나, 결국 잘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이야기를 먹어치우는 사람이 있다

이곳이 인공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부드럽게 젖어 떠내려간다

다음 페이지, 밀려오는 또 그다음 페이지까지



 서핑에 대한 시인가, 하고 읽었다가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게 책이라는 걸 알았다. 바다 저편에서 파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작가에 대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부드럽게 밀려오는 페이지에 젖어 점점 바다로 떠내려가는 독자는 빠져든 이야기가 인공이 아닌 사실로 믿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밀려오는 이야기에 발부터 담그고 점점 온몸을 푹 적시는 경험이 떠올랐다. 책의 강력한 힘, 그러니까 자꾸만 깊은 물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세찬 파도를 경험했던 때는 누구나 있지 않을까.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말이다! 밤이 깊은 걸 알면서도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책을 덮지 못하다가, 새벽에야 잠들게 한 강렬한 책이 여러 권 있다. 학창 시절로 기억하는 맨 처음은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장르는 여전히 내게 강력한 힘을 휘두른다. 덕분에 금요일 밤에는 소설책을 들게 된다. 어제는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를 한자리에서 읽고 말았다. 지하철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이야기에 빠져서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이 안 나지만,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날씨가 좋아서 우리는 멀리까지 가기로 했다'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이는 '우리'이다. 함께 같은 책을 읽은 일의 기쁨도 매우 크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사는 시간이 아닌, 태곳적의 어떤 시공간을 상상하며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이 엄마와 같은 책을 공유하며 읽은 첫 책이었다. 그 후로도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소설들을 나는 종종 엄마에게 선물해서, 나도 읽었던 것 같다. 또 하나 가족이 함께 읽은 잊을 수 없는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였다. 꽤 두꺼운 책을 세 권이나 읽은 스스로가 대견했고, 같은 책을 엄마 아빠도 읽어서 더 기뻤던 것 같다.

 같은 책을 읽는 기쁨을 요즘에는 독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들으면서 자주 느낀다. '책읽아웃'에 소개된 책을 따라 읽으면서 인스타그램에 후기를 남기고, '책읽아웃' 팬클럽 광부님들과 공감하는 즐거움으로 SNS 활동을 하고 있다.

 

  국어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책 소개를 종종 한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책에 대해 말하는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몇 명도 있을 것이다. 언제 어떤 계기로든 내가 소개한 책들을 한 번이라도 거들떠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생들이 한 가수를 좋아하고,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듯 내가 책 혹은 작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때의 그 에너지를 느끼면서 '얼마나 재밌길래', '도대체 뭐가 좋아서' 이런 마음이라도 가져 보기를. 그래서 언젠가 다른 자극 말고 책이라는 물성을 손에 쥐고, 호기심에 한 번쯤은 텍스트를 읽어 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내 소개글에는 '평생 독서가'를 키운다고 쓰여 있다. 지금 당장은 책 읽는 즐거움을 몰라도 차차 알게 될 아이들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나는 학생들을 만난다.

 올해부터는 다른 꿈도 생겼다.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쓰는 작가도 키우고 싶다. 대단한 소설가나 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기는 국어의 기본이다. 학생들과 1분 쓰기나 수업 일기 등 쓰는 활동을 늘 해오는 만큼, (물론 수행평가도 하고)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게 SNS에 올리는 글이 되었든, 연애편지가 되었든(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겠지? 있었으면 좋겠다), 경고문 혹은 호소문이 되었든 글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저자가 되면 더욱 좋겠고! (물론 저자는 나부터 되고 싶다.)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책에는 인구의 10% 정도가 저자가 되는 사회, 사회적 이슈가 생겼을 때면 책으로 의사소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나온다. 독서 모임, 토론이 활성화되는 그런 사회를 내가 먼저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파릇파릇한 학생들을 통해 말이다!


 주민현 시인의 시를 읽다가 여기까지 왔다. 시를 통해 나는 책 읽는 기쁨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책 쓰는 행복까지 말해버리고 말았지만. 아니 아직 그 행복은 모르지만, 글쓰는 행복은 조금 알겠다. 일주일에 한 번 브런치에 글쓰기를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



@ 주민현, <킬트, 그리고 퀼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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