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안감을 환기시키는

사만타 슈웨블린의 <피버 드림>을 읽고

by 조이아

심장을 조여 오는 듯한 이야기들을 힘겨워한다. 몇 년 전에 본 영화 <곡성>은 여전히 왜 본 걸까 후회하며 잊고 싶고, <기생충>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책도 그렇다. 추리소설과는 결이 다른 스릴러물이 내게는 버겁다. 강화길의 <화이트호스>도 -물론 이야기에 푹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데, 심장이 쫄깃해진다는 표현이 뭔지 알게 한다- 겨우 읽다가 작가님의 능력에 감탄을 표하며 후반에 등장하는 단편들은 포기했다. 이런 내가 강렬한 소설 읽기에 도전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력적인 여성소설 읽기'라는 창비 스위치에서 하는 필라멘트 북클럽이다. 3개월 동안 진행되는 북클럽은 한 달에 한 권, 북메이트가 선정한 책을 읽고 각자 미션을 수행하고, 마지막 날에는 줌으로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독서 팟캐스트 '책읽아웃'- '어떤, 책임'의 캘리 님이 북메이트로 나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알아본 거다. 세 권의 책은 여성 소설인데, 나는 첫 번째 책이 무서울까 봐 참여를 망설이다가 '책읽아웃' 팬들로 구성된 오픈채팅방의 훈훈한 분위기에 휩싸여 신청하고 말았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은 <피버 드림>이다. 검색해 보니 아르헨티나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의 소설로 미디어의 찬사가 눈에 띄었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새벽에 이 책을 손에 쥐고 읽는 동안 낮고 메스꺼운 스릴이 나를 덮쳐 왔다. 30면쯤 읽고 나서 집 현관문이 잘 잠겨 있는지 확인했고, 전부 다 읽고 나선 창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 <뉴요커> 일부


2021 공개 예정 넷플릭스 오리지널 무비 원작 소설이라고도 하니, 얼마나 무서우면 넷플릭스로 만들어지는 걸까 싶었다. 책을 주문해서 손에 넣고도 표지만 보고 넘겨보질 않았다. 한 번 읽어볼까 하다가, 작가 소개가 있는 내지가 찢어진 걸 발견하고, 이런 책을 받아보다니 정말 나랑 안 맞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면서 다시 덮어뒀다.


어제 15일에야 - 그러니까 5월이 반이나 지난 후에야, 창비 스위치에 로그인해 보았다. 시험 주간이 끝나고도 바로 수행평가 안내와 활동으로 바빴다. 원격수업 주간도 등교 수업 주간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학교에서 틈이 날 때 스위치를 슬쩍 들어가 보았다가 별 공지가 없는 것 같아서 창을 닫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로그인을 했어야 했던 거다. 모바일로 로그인하니, '모임 참여' 버튼이 보였고 그제야 미션들이 눈에 띄었다. 16일까지의 미션은,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른 이미지를 사진으로 올리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은 뒤로 미룰 수 없다 싶어 읽기 시작한 게 오후다. 오전 내 바빴다. 원격수업 주간이면 더 눈을 깜빡이는 둘째를 데리고 안과에 다녀왔고(토요일 오전 병원은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 키가 훌쩍 자라 맞는 얇은 긴바지며 반바지가 없는 큰아이를 데리고 쇼핑도 해야 했다. 다녀와서는 대출기간을 연장했던 책 한 권을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도 슬슬 걸어서 다녀왔던 것이다.


네 시부터였다, 소설을 펼쳐 든 것은. 그리고 나는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다. 예전에 읽었던 <거미여인의 키스>가 생각났다. 그때처럼 명확하지 않은 묘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를 생각하며 다음 페이지, 또 그다음을 넘겨가며 내 손과 눈은 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상황인지,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지금 그들이 말하는 '벌레'란 무엇일지. 설마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두근두근한 불안감을 동반했다.


소설은 아만다와 다비드의 대화로 이루어졌다. 아만다는 딸을 데리고 낯선 마을에 휴가를 보내러 온 차였고, 그때 만난 다비드 엄마 카를라와의 사건(이랄 수도 없는 만남)에 대해 다비드에게 말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다비드가 궁금해하는 것은 '벌레가 언제 생겼는가?'이지만 아만다가 궁금한 것은 딸 '니나는 어디 있지?'이다.

책에는 '구조 거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보호자인 내가 달려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최단 거리라고 한다. 아만다는 끊임없이 구조 거리를 헤아린다. 수영장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아이, 차 안에 있는 아이, 집 안에 있는 아이에 대해 계속해서, 여차 하면 내가 손 쓸 수 있다는 이 개념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밤낮으로 하는 생각일 것이다.

딸을 지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 눈 앞에 없으면 불안하고 내 앞에 있을 때에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에 대해 소설은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보호자의 부주의에도 있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도 한몫 크게 차지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까지 조마조마하다.


이 읽기는 꽤 강렬하게 내 안의 불안감을 환기시켰다. 불안한 마음으로 서사를 따라가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있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둘째 아이는 감기마다 유독 열이 심했다. 39도를 훌쩍 넘은 아이가 축 늘어져서 자거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댈 때, 눈 앞에 있는 나도 못 알아보는 것 같은 밤이면 이 아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큰아이에게 정체 모를 경련이 있었을 때도 물론 생각났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대처할 바를 몰라 쩔쩔 매고, 응급실로 간 밤이었다. 주사 기운에 자고 있는 아이를 들여다보며, 아니 중환자실은 면회가 제한된다며 들어가지도 못하게 한 그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저 아이가 깨어날 수는 있을까, 깨어나서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면 어떡하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자책과 불안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 경험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당황스러웠다.


<피버 드림>에 대한 미디어의 찬사는 이 책이 이렇듯 강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해서일 터다. 강렬한 감정적인 체험을 나는 힘겨워하면서도 흠뻑 빠져들어 읽고 말았다. 그리고 내 앞에서 한껏 게으른 자세로 게임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을 보면서 조금은 안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있는 환경의 폐해가 두려워졌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유해 물질을 제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것은 이미 아는 것-플라스틱-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물질일 수도 있다. 혹은 미디어 환경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가족의 문화, 자본주의, 전 인류의 생활습관이 될 수도 있겠지.


내 공포의 원인은 불안감과 두려움일 것이다. 이 불안은 내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마스크를 쓴 채 감염을 걱정하는 현 시점에서 그냥 당하기만 하기에는, 내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구조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우리 사이의 실은 얼마나 느슨한지, 팽팽한지, 그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바삐 가늠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야할 때다. 우선은 배달음식부터 줄여야겠다. 장바구니를 챙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용기’를 챙기고, 육식을 줄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것뿐이지만, 거대한 기업이나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차고 넘쳤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모성애를 자극하는 소설을 통해, 그레타 툰베리처럼 지구 환경에 대해 우리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구를 살리는, 미래의 아이들을 살리는 실은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 구조 거리를 가늠하며 달라져야 할 때다.


<피버 드림>을 읽으며 떠올린 이미지 <Annie du lac> Kitty Crowther의 한 장면


@ 사만타 슈웨블린, <피버 드림>, 창비

@ 키티 크라우더, <아니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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