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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y 03. 2020

엄마와 색칠공부

지난 설에 엄마를 뵙고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그 기간 동안 나의 일상에 약속 따위는 없었다. 매일 학교,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단순만 나날들이 반복될 뿐이지만, 엄마를 뵈러 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혹여 나도 모르게 팔순의 엄마에게 코로나를 옮길까 걱정스러워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을 뿐이다.


엄마는 드라마와 유튜브로 트로트 노래 듣기를 좋아하신다. 각 방송사의 드라마는 아침 여덟 시부터 시작한다. 게다가 약간의 시간의 겹침을 감안하면 거의 두 시간 넘게 비슷비슷한 내용(주로 캔디형 여성이 권력자형 남성의 도움으로 이라이자 스타일의 나쁜 여자, 혹은 남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드라마다. 엄마는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과 대화를 나누며(너 그래 봤자 소용없어. 저, 저, 나쁜 년! 등 등장인물과 갖은 대화를 나누신다.) 드라마를 섭렵하고 나면 열심히 단장을 하고 노인대학으로 출근을 하신다. 노래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집 근처 노인대학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노래교실은 일상의 중심 같은 중요한 일정이다. 그 노래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엄마는 일주일 동안 노래 가사를 외우고 유튜브를 보면서 흥얼흥얼 연습을 하신다. 그런데, 코로나 19 유행으로 인해 노래 교실은커녕, 노인대학마저 문을 닫았으니,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일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힘든 시간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두 달째, 코로나 19가 언제 종식될지 알 수조차 없으니, 코로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의 무게를 새삼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색칠 공부에 입문하다


엄마와 함께 사는 언니는 늘 엄마가 걱정이다. 나와 전화로 수다를 떨면 대화의 절반은 엄마 걱정이다. 언니는 우리 시대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그렇듯 별다른 취미가 없는 엄마가 늘 걱정이다. 뭐라도 하셔야 시간이 잘 갈 텐데 오직 유튜브만 틀어놓고 하루를 보내니 얼마나 지루하겠냐는 것이다.

어느 날, 언니가 엄마를 위해 컬러링 책과 색연필 세트를 사 왔다.

"엄마, 심심할 때 이것 색칠하기 해봐. 재미있어."

엄마 연배의 어르신을 모시는 주변 친구가 언니에게 색칠공부를 권했던가보다. 그분은 이 색칠공부를 정말 재미있게 하신다면서, 시간 때우기는 최고라고, 엄마에게 한 번 권해보라고 했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존심이 매우 센 분이시다. 색칠공부 따위야 초등학생들이 하는 것인데, 왜 이걸 나이 든 어른인 나에게 권하느냐는 것이 첫 반응이었단다. 언니는 굴하지 않고, "그래도 심심할 때 한번 해봐." 하면서 엄마에게 내밀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엄마가 색칠공부에 빠지신 것이다. 매일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유튜브를 틀어놓고 누워계시던 엄마가 색칠공부를 하신다는 거다. 너무 열심히 하셔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가장 좋은 일은 색칠공부를 시작하신 후로 엄마가 깊은 잠을 주무시게 된 일이다. 엄마는 평소 초저녁에 잠깐 주무시고 나면 밤잠을 잘 못 주무시고 새벽에도 자주 깨어있곤 하셨다. 깊은 잠을 못 주무시니 당연히 여러 꿈이 찾아와 엄마를 힘들게 했고, 식구들이 다 잠들어있는 새벽에는 아침이 올때까지 무료한 시간을 혼자 견뎌야 했다. 그런데, 색칠공부를 시작한 후로 일찍 주무시고 깊게 주무신다고 한다. 어쩌다 새벽에 깨는 일이 있어도 침대위에 펼쳐놓은 작은 상에서 색칠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나는 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육체노동인지를. 가만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 쉬운 일이 절대 아님을.

언니가 빈 곳 없이 다 칠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당신은 안 칠하는게 더 나은거라며 감각을 뽐내신 화초장. 나도 엄마 감각에 한 표. 다 채우는게 꼭 좋은 것은 아니야, 그치,엄마.

어느날, 언니가 엄마의 색칠공부를 우리 자매들의 톡방에 올렸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색면으로 칠만 했는데, 언니가 혼색을 가르쳐 드렸더니 이제 그러데이션과 명암을 표현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셨다. 언니가 엄마의 취향에 맞춰 사드린 전통문화 주제의 컬러링 책의 섬세한 색칠에 우리 모두는 감탄했다.

엄마가 특히 자부짐을 가지고 자랑하신 섬세한 손톱과 눈화장.
48색도 부족해

이제 엄마는 '색연필 색이 부족하여 마음대로 칠할 수 없다'는 도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셨다. 색연필 이야기를 들은 동생들이 사서 보내드리겠노라고 난리가 났다. 내가 안 쓰는 색연필이 있으니 보내드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언니와 통화를 했더니 웬걸, 엄마가 쓰시는 색연필이 48색이란다. 내가 보내드리려고 했던 색연필도 48색인데?? 48색이 부족하다고? 아, 엄마는 진짜 예술가가 되어가시는 것 같다. 나는 얼른 인터넷을 뒤져 72색 색연필 세트를 주문했다.


지난 연휴, 김포사는 넷째네가 엄마를 모시고 왔다. 가까이 사는 나도 넷째네로 가서 뜻하지 않은 번개모임이 되었다.


엄마는 넷째네 집에 올 때도 손수건으로 묶은 색연필과 컬러링 책을 핸드백에 넣어 오셨다. 그것을 본 언니도 깜짝 놀랐다. 엄마는 수줍어하시며, 심심하면 칠하려고 가져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책을 펼쳐 보이시면서 자랑을 하셨다. 우리도 섬세하게 칠한 연꽃, 화병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 화병에는 엄마 스스로 꽃을 그려 넣었다.

"이건 엄마가 직접 그린 거야?"

"이, 나가 꽃은 잘 그리는디 이건 생각대로 잘 안됐어야."

완쪽 화병의 꽃은 엄마가 직접 그려넣은 것이다. 젊은 시절 엄마는 자수 꽃 도안을 직접 그렸노라셨다.

예전 같으면 우리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가 졸리면 방으로 들어가 누워서 노래를 듣다 주무시곤 하셨는데, 이제는 방에서 컬러링 책을 펼치고 색칠을 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다시 색연필과 책을 가지고 나와 '여기는 어떻게 칠하는게 좋을까?' 하고 물으시곤 또 방으로 들어가신다. 진짜 재미있다고 하셨다.

왼쪽.색칠 삼매경 울엄마. 오른쪽. 레슨중인 울 엄마. 톡방에서 이 사진을 본 막냇동생에게 혼났다. 나이 많은 '학생님'을 세워놓고 가르친다고.

엄마는 평생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를 키우는 것이 취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들이 장성하여 독립하고 난 후에는 등산이 엄마의 취미이자 중요한 일상을 차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등산을 할 수 없게 되신 팔순의 엄마는 트로트 음악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하지만, 이제 엄마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팔순에 예술에 입문하신 울 엄마, 조만간 더 큰 색연필 세트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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