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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25. 2021

5.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딕존슨....>리뷰와 홀바인의 <대사들>

*스포일러가 있을 있습니다. 걱정되는 분은 패스해주세요.

영화 제목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Dick Johnson is dead.)
감독  커스틴 존슨
주연  딕 존슨
상영시간  1시간 30분
요약  평생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감독 커스틴 존슨.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 코믹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그렇게 그들은 이별을 준비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는 늘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어!

딕 존슨은 시애틀에서 정신과 의사로 평생을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를 만났고 아이들을 키웠으며 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와서 위안을 얻고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노년의 딕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환자의 상담을 진행할 수도, 혼자서는 일상을 이어가기도 어렵다. 딕은 시애틀에서의 자신의 삶과 작별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딸 커스틴과 살기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딕 존슨의 딸인 커스틴 존슨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아버지인 딕 존슨을 너무나 사랑한다. 딕은 개방적이면서 이상적인 아버지였다. 커티스는 딕의 소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수년 전 알츠하이머로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이제 같은 병에 걸린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한다. 돌이켜보니 세상 많은 사람들의 영상을 찍어왔지만 막상 부모님의 영상은 별로 찍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시애틀 딕의 집 헛간. 손자들의 그네 타기를 도와주던 딕은 미끄러운 헛간 바닥에서 미끄러진다. 손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 딸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사람을 떠나보내는 생각만 해도 견디기가 힘들다. 이 사람은 나의 아빠다. 아주 개방적이고 누구나 원하는 그런 아빠."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이는 딕의 모습에서 그의 병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는 유쾌하고 유머가 있다. 손녀의 그네를 밀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찍었어? 나는 늘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어.'라고 외친다. 가족들의 밝은 모습 속에는 그의 소멸을 외면하고 싶은 아픈 마음들이 숨어 있다.

 내가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나 봐!

영화에서 딕은 여러 번 죽는다. 빌딩에서 떨어진 에어컨에 맞아 뇌진탕으로 죽고 심장마비로 죽고, 심지어 교통사고와 짐꾼과 부딪친 후 과다출혈로 죽기도 한다. 그러니까 딕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에서 계속 부활한다.


커티스는 딕의 죽음을 연출하는 과정에서의 대역의 역할과 연출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역은 딕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분장을 하고 그의 옷을 입은 다음 그 대신 뇌진탕으로 죽는다. 딕은 그런 자신의 죽음을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와 같은 장면 연출은 영화 내내 계속된다. 그래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딕의 죽음은 심각한 사건이라기보다 웃음을 자아내는 한 편의 연극 같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만 준다면 참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서로를 잃는 고통도 마주해야 한다. 상황이 나빠지면 우리는 꼭 껴안는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짧은 기쁨에 감사한다.

뉴욕으로 이사한 딕은 모든 것이 낯설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상생활, 스피디하게 지나가는 지하철, 혼란스러운 핼러윈의 밤.


 딕의 시간만 느리게 흐른다. 그가 알츠하이머로 자신을 잃는 시간은 점점 많아진다. 이제 그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분간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딕의 안락의자와 그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 정도일까? 그는 자신보다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할 딸을 더 걱정한다."나는 아버지가 아니고  네 동생이야. 동생은 말썽을 피우는 거야." 이 말을 하면서 딕은 미소를 짓는다. 이내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딕이 시애틀로 떠나기 전, 딕의 지인들은 딕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실제로는 아직 죽지 않은 그의 관 앞에서 그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교회 문 틈으로 자신의 장례식을 지켜보던 딕은 이렇게 외친다.

"내가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나 봐!"

슬프고 유쾌한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살아난 딕은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딕은 점차 자신을 잃어간다. 촬영장의 닉은 영화 초반에 보여준 유쾌함을 잃고 힘겨워 보인다.


커티스에게 딕의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않은 사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떠나간 사람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부활시키지 않는가? 딕의 가상 장례식에서 그의 환자였던 한 여성은 딕을 추억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딕은 기억을 잃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딕의 기억은 우리 안에 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쯤 봐야 할 영화

내가 청춘의 한가운데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늙은 모습의 나'는 상상조차 안 해봤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청춘의 시간이 지나고 누구나 공평하게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늙은 나를 발견하고 잠시 철학자가 되어본다.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지나간 시간과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딕처럼 소멸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부모를, 나 자신을 곁에 두고 있지 않는가.  


영화는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코미디에 가까운 유쾌함을 준다. 영화를 따라 울다 웃다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스럽고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커티스는 왜 아버지의 죽음을 영화로 만들었나?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유쾌하게 다루어도 되나? 딕은 왜 반복해서 죽는 걸까? 자신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소멸을 보는 과정이 딕에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소멸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소멸을 원하는가? 죽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사실, 영화의 분위기와 홀바인(1497~1543)의 유화작품 <대사들>의 분위기는 죽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유사점은 없다. 어찌 보면 영화와 정 반대의 분위기라 할 수도 있겠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그림 아랫부분의 이해할 수 없는 형태는 왜상으로 그려진 해골이다.

그림에는 두 사람의 젊은 남자와 해시계, 지구본, 나침반, 수학책, 악기 같은 물건들이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표정은 매우 긴장되어 보인다. 이들은 종교와 관련된 중재를 위해 파견된 대사들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온 외교관과 대주교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은 두 사람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임을 보여준다.(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16세기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림 아랫부분에 그려진 정체 모를 덩어리다. 이건 무엇을 그린 것일까? 이 덩어리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그림을 컴퓨터 화면에 꽉 차게 확대시킨 후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한쪽 눈을 형체의 왼쪽 아래 검은 부분이나 오른쪽 위에 바짝 대고 보자. 이렇게 실제 사물을 알아보기 어렵게 비율을 왜곡해서 그린 그림을 왜상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유행했던 그림이었다.

해골 부분을 확대한 그림. 턱이나 정수리 위치에 한쪽 눈을 대고 보면 해골이 보인다.

 그러면, 작가는 왜 해골을 그런 것일까? 이 해골은 바니타스(Vanitas), 즉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무리 최고의 지식인이나 권력자 일지라도 모든 것은 결국 신의 뜻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교훈을 담은 셈이니, 당대 최고의 지식도 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이 그림이 계단의 벽에 걸려 있다면, 왼쪽 아래에서 올라가거나 오른쪽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언제나 이 해골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해골은 우리에게 너는 유한한 존재이니 신 앞에서 겸손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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