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추리기] 2018년

4년 전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에 웃고 울었나

by 이진희

미니멀 리스트라고까지 이야기하긴 힘들지만 '들어올 물건이 있으면, 어떤 물건은 나가야 자리가 난다' 정도의 원칙을 지키고 산다. 서가는 늘리지 않은 채로 새 책이 늘어나면 묵은 책을 줄이고, 새 코트를 하나 사려면 안 입는 오랜 코트를 하나 버리는 식이다.


이 원칙이 시험에 들 때가 있다. 추억이 담긴 기록물 앞에서다.


삶이 길어질수록 추억이 담긴 기록물도 늘어난다. 책장 한 칸을 꽉 채우고, 해가 넘어가 새로 한 권 꽂지 않는 한 거의 들여다보지 않으니 말 그대로 짐이다. 이것도 추려야겠다 싶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지난 다이어리를 훑어보고, 인상적인 대목과 페이지만 남기고 버리기로 했다. 시작은 2018년.




#1. 모 출판사와의 미팅

나를 지키는 관계

기술이 아니라 태도

하루 하나 눈에 들어오는 문장으로

말투만 바꿨을 뿐인데

20대 후반에서 40대 여성

글은 2페이지 반에서 3페이지

제목이 NVC 적이지 않은 대중서

그렇다면 깊이는 얼마나?

---> 이날 미팅을 마치고, '저보다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보기 좋게 정리하기엔 대화에 대한 제 생각이 아직 뒤죽박죽이라서요'라며 고사했다. 내 앞에 또 다른 작가 후보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내 거절 이후에 또 다른 작가와 미팅할 거란 느낌이 얼핏 들었다. 마음이 영글지 않으면 섣불리 덤벼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얼마지 않아 마일스톤 출판사의 새내기 편집자가 연락을 해왔다. 팟캐스트를 하나하나 듣고, 본인의 아이디어를 적은 제안서를 들고 왔다. 마음이 울려 계약서에 도장 쾅. 우여곡절 끝에 올해 6월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4년 전 했던 미팅 기록을 보니 뜻이 맞는 출판사와 편집자를 만나는 게 행운이지 싶다. 새삼 감사하다.


#2. 혐오, 서울대 성 소수자 현수막 파손

밤 너 혼자 몰래 찢다 (공격)

낮 다 같이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반창고를 붙이다 (연결과 치유)

---> 당시에도 이미 몇 년 전 사건이었지만 홍성수 교수님의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책을 읽다 다시 찾아봤다. 현수막을 훼손한 사람은 뭐가 부끄러웠는지 몰래 밤에 혼자 찢었다. 하지만 찢어진 현수막에 반창고를 붙인 이들은 낮에 드러내고 여럿이 했다. 뒤에 숨어서 공격하고 혐오하는 이들과 상처를 함께 치유하는 이들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던 계기다.


#3.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소년은 어른이고,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어른은 소년이다.

---> SNS에서 보고 옮겨 적어 놓은 것 같은데, 누가 이렇게 멋진 통찰력으로 유려하게 표현했을까.


#4. 공감의 증거

나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찝찝하지 않음

상대는 톤이 가라앉고, 으응~ 자기 얘기를 충분히 해서 마치고 내 이야기 들으려 함

해결책을 스스로 찾거나 먼저 물어옴

---> 팟캐스트 <대화만점>을 제작하고 비폭력대화 중재과정을 들은 해라 다이어리 여기 저기에 공감과 위로에 대한 고민이 흩어져있다. 얼마 전 뒤늦게 <나의 해방일지>를 정주행 해서인지 '해방감'이란 단어가 콕 눈에 들어왔다. 이런 메모들 하나하나를 그러모으다 보니 책이 되었다.


#5. 우리말의 신비

흔히 부정 + 부정 -> 긍정, 긍정 + 긍정 -> 부정인 예는 전 세계적으로 없다.

하지만 한국어는 그게 가능!

'잘도 그러겠다.' 긍정 + 긍정인데 묘하게 기분 나쁜 부정

한 문장에 3개 국어 : 야! 핸들 이빠이 꺾어!

---> 별 거 아니지만 키득거려지는 순간의 말들에 관심이 간다. '핸들 이빠이 꺾으라'는 너무 자연스러운데 무려 3개 국어가 들어간 문장이었어. '잘도 그러겠다'는 식의 빈정거리는 말들은 내 대화의 정원에서 솎아내고 싶다.




이 외에도 페리파토스의 여행수업, 비폭력대화 중재과정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오형수 대표님의 강의가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강의록이 빽빽했다. 이렇게 추려보니, 그 해 배우고 성장했던 기억과 그 내용이 다시 흡수된다. 이제 2018년의 다이어리는 홀가분하게 보내줄 수 있겠다. 개인정보가 담긴 페이지는 잘 분쇄해서. 잘 가렴~ 나의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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