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왜 여자의 결정은 의심받을까? / 터리스 휴스턴/ 문예출판사
꽤 큰 액수의 물건을 살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 써야하는 품목이라 마음에 쏙드는 녀석으로 마련하고 싶었지요. 예상보다 비쌌어요. 파는 분에게 깎아달랬더니 조금 빼주시더군요. 그래도 여전히 가격이 아쉬웠어요.
다른 물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흥정하며 파는 쪽의 요구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한번더 협상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같은 가격에 사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파는 분에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소심함이 발목을 잡습니다.
'여기서 또 깎아 달라고하면 나를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결단력도 없고, 신의가 없다고 여기고 말야."
그렇다고 그냥 사면 아쉬울 게 분명했습니다. 말이라도 해봐야 거절당해도 미련이 안 남잖아요. 우물쭈물하던 와중에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남편이 협상하면 어떨까? 맘에 들어했잖아. 남자니까 원하는 걸 끈기있게 요구하고, 끝까지 목적을 이루려는 기세로 좋게 보이지 않을까? 상대를 설득하는데도 유리할 것 같아!'
수신자를 남편으로 바꾸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러저러하니, 더 깎아달라고 ‘당신이 말해주면 안 될까’라고요.
남편은 무심한 듯 ‘그랬으면 좋겠어? 일단 알았어’라더군요. 약간 마음이 편안해진 걸 느끼며 읽던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어떻게 여성은 결정하는가(How women decide)?’입니다. 한국어 책은 제목을 바꾸어 달았네요. 기획자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여성의 결정이 의심받고, 그래서 여성이 인정받거나 성장하기 어려운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요. 내용의 일부를 옮겨 봅니다.
존 통계 : S&P1500을 보면 이름이 존인 남성 CEO가 모든 여성 CEO보다 많다.
개썰매 문제 : 여성은 썰매가 경주로를 잘 헤쳐 나가도록 준비시키는 데 필요한 결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깃발이 올라갈 때 모두 남성이 썰매를 몰 거라고, 가시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경주를 승리로 이끌 거라고 기대한다.
여성이 시간을 들여 선택지를 분석할라치면 생각이 깊고 세심하다기보다 결단력이 없거나 무능하다고 평가받을 공산이 크다.
인지심리학자인 저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결정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회적, 역사적 편견을 반박합니다. 비슷한 편견 앞에 좌절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때마다 상대뿐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해 답답했던 느낌도 함께요.
책을 읽으며 ‘아! 그렇구나!’를 여러번 외쳤습니다. 현명하게 결정해놓고도 내가 여성이라 의심받을까봐 더 준비하고 긴장했던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를 건내면서요.
많은 책이 ‘주위의 용기 있는 남성들처럼 자신감을 가져라!’ 식의 조언을 합니다. 때로는 여성 저자들이 더 몰아붙이기도 해요. 저자는 그런 조언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경고합니다. 주변의 편견이나 제약은 그대로 인정하며 그 안에서 아무리 애를 써봤자라고요.
결정할 때, 남성도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한 과신은 현명한 의사 결정에 주요한 걸림돌이며 여성의 어떤 성향은 결정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하네요. 여성이 의사결정에 많이 참여할수록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저자는 어떻게 하면 여성이 결정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도 건냅니다. ‘자신감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다이얼로 여기라’는 팁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떨 때 자신감을 높이고 어떨 때 낮춰야하는지 가이드라인도 제시합니다.
결정을 할 때 받는 스트레스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남녀의 뇌가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도 자세히 알려줍니다. 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결정할 수 있는 방법도 함께요.
400페이지 가까운 글과 50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 같이 읽으면 좋을 책 목록까지. 정말 실하고 정성스러운 책입니다. 여기 나눈 내용 외에도 각자 도움되고 마음에 와닿는 내용들이 많을테니 꼭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이 재밌게 느껴질수록 마음에서 불편함이 자라납니다. ‘당신이 말해주면 안 돼?’라는 부탁 말이에요.
저 자신부터 제 태도와 결정을 의심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겁먹고 숨으려고 했지요. 협상의 상대도 편견을 가지고 절 볼 거라고 위축되었고요. 말하자면, ‘우먼박스’에 갇혔달까요!
낯선 경험은 아니었어요. 학교에서, 회사에서, 모임에서 오랜동안 자주 벽에 부딪혔으니까요. 조용히 있을수록 안전했어요. 뒷담화를 감당하는 것보다 묵묵한 부품이 되는 게 쉬웠습니다.
사회나 조직이 당장 달라지진 않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내 결정은 내가 바꿀 수 있어요. 이번처럼 스스로를 프레임 안에 가두는 일은 끊고 싶었습니다.
마침 남편이 제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요즘 ‘맨박스’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자기 감정에 솔직해보려고 노력중이거든요.
제 부탁을 받고 ‘응? 저런 생각이 들었으면 직접 말하면 되지 굳이 내가 왜? 불편한데’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하더라고요. ‘내가 해결해 줄게!’라는 책임감 맨박스에 갇히고 싶지 않다고요.
직접, 파는 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가격을 좀더 깎아주시면 좋겠다고요. 연락하기 전에 ‘나는 충분히 고민했고, 내 판단은 현명하다’고 듬뿍 자신을 응원해 주었지요.
파는 분(남성)도 절 비난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어요. ‘잘 이야기하셨다’고 격려까지 해주시더라니까요. 더 깎아주긴 어렵다고 거절을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저를 믿고 행동했으니까, 우먼박스에 작지만 확실한 흠집 하나를 냈으니까요.
자꾸 흠집 내다보면 어느새 우먼박스가 너덜너덜해지겠지요? 다시 거기 갇히지 않을 힘도 생기고요.
또 누군가 혹은 스스로가 저를 옭아매면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 든든한 전략가 같은 이 책을 다시 펼쳐 볼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