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멋진 마을 / 후지요시 마사하루

혁신을 일상에 녹여 낸 마을, 후쿠이 리포트

by 이진희

아기자기한 에세이인 줄 알았어요. 표지엔 벚꽃이 활짝 피어있고, 제목도 '이토록 멋진마을'이었으니까요. '행복동네 후쿠이는 어떤 동네일까?' 하는 기대로 책을 펼쳤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컸어요.

사회구조 자체가 평등하지 않은데 불공평타령만 해대면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지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일본 후쿠이 현과 그 시민들입니다. '후쿠이'라는 곳을 아시나요? 저는 후쿠이 현이 낯설었어요. 아래 지도의 빨간 부분입니다. 일본에서도 상대적으로 외지고 개발이 덜 된 현으로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바닥을 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더군요. 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후쿠이 현의 한 도시인 사바에라는 곳은 '안경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19세기부터 안경테 산업이 발달했으나 중국이 염가의 제품을 내놓으면서 도시경제 자체가 마비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후쿠이 주민들은 후쿠이의 역사가 '패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머리를 써서 살아남아야 했으며 유일한 무기는 교육이고, 학교는 생존을 위한 준비의 장이었다고요.

그랬던 후쿠이가 주민들의 만족도, 산업, 교육, 생활환경, 여성의 사회참여율 등에서 높은 순위에 오릅니다. 이를 특이하게 여긴 저자가 후쿠이에 가서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점을 쓴 책이 바로 이 책이지요.

저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부지런히 조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혁신관련 책에 비해 한결 풍성하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정확히 20년 전인 1998년에 일본기업의 순자산이 늘고 인건비, 특히 보너스가 극단적으로 줄어듭니다. 비정규직, 저임금 등 오늘날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가 그 때 시작된 것이죠.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만혼과 저출산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즈음입니다. 당시 NHK방송문화연구소가 시행한 일본인 의식 조사에서 '국민의 의견과 희망이 국가정치에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정부에 대한 불신과 자살에 이를 정도의 절망'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많은 부분 우리의 현재와 닮아있죠. 고질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구하나 해결하려하기보다는 걱정하고 회피하는 분위기. 그래서 이 책의 아래 대목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질문자 대부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묻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p.109)


후쿠이 현 정부는 여러가지 면에서 과거 정부나 여느 도시와 다르게 결정합니다. 빈곤층과 약자 대상이던 사회정책을 '전국민 대상'으로 확대한 1960년대 핀란드의 사회정책 전환을 본받아 복지에서 특정 계층 뿐 아니라 지역 전체를 두루 살핍니다. 일본도 불공평이 화두인지라 이 결정이 주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고 합니다.

가령, 도시가 확산되어 도로정비율과 도로개량률이 높아지면 세수부담이 커집니다. 소외된 지역가지 다 돌보려면 도로를 만들고 관리해야하니까요. 후쿠이 현은 '콤팩트시티'를 만들어 모든 필요공간을 도보로 이동가능한 도시로 바꾸었습니다. 걸어서 생활할 수 있는 지역을 경단처럼 엮고 공공교통은 꼬챙이처럼 그 사이를 관통하게 설계합니다. 노령화로 운전이나 장거리 이동이 힘든 인구가 도심에 모이게 됩니다.


이런 사례는 시장이 포틀랜드를 답사하고 깨닫게 된 것인데요, 그 외에도 교통비 무료정책 (스위스 바젤), 자전거 시민 공용이용 시스템 (스페인 바르셀로나)처럼 다양한 해외도시의 좋은 사례들을 이 지역에 맞춰 실행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지자체 장들도 해외답사나 연수를 많이 가지요. 후쿠이 현은 시장이 개인휴가를 내고 사비(정확히는 개인후원회 사람들이 모아준 돈)로 답사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시장의 개인후원회 사람들이 나가라면서 등을 떠밀었다고 하네요. 시장은 얼핏 머리 좋은 독재자 같지만 실은 머리좋은 시민의 공복이 되었습니다. 해외시찰에 세금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지와 응원이 배가되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정책의 수혜는 데이터와 논리로 보여줍니다. 주민들이 ‘이득을 보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비효율적이었던 사업을 굳이 관이 하지 않고 민간에게 넘겨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게 합니다. 이 모든 변화에 대해 포퓰리즘이라는 비난도 한때 있었지만 후쿠이 시장은 이런 믿음을 굳게 붙잡고 기조를 유지해 나갑니다.


지금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인기영합주의
30년 후의 시민의 목소리를 의식하라

관이 이렇게 변화하자, 민도 호응합니다. 향토애를 기반으로 시장조차 놀랄 정도의 기부와 출자가 일어난 것이지요. 무엇보다 인상적인 대목은, '주체성'입니다. 인터뷰 곳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주역이 되어 각종 사업을 이끌고, 주민들 스스로 누군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하겠다는 의이 느껴집니다. 문화도 사업도 자신들이 혁신을 지속해나가는 지역사회. 물론 여기에 필요한 것은 '부지런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어느 지역에서 창업할까'하는 문제를 두고 사람과 기업이 지역을 고르는 시대라고 합니다. 어떤 지역을 고를 때는 사무실 임대료, 인건비, 교통 인프라 같은 눈에 보이는 수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꺼이 수용할 가치관과 기개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주민들이 주체성의 DNA를 가진 후쿠이 현은 이 점에서 새로운 정착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입니다. 거기에 낯선 이를 끌어들이는 대접의 전통까지 접목되어 일본에서는 창업하기 좋은 도시로 널리 알려집니다.


한 인터뷰이는 지역이 살려면 기존 주민들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고 합니다.(p.124) 안목있는 외지인과 젊은이가 유입되어야 하죠. 하지만 황폐해진 마을에는 보통 초대받지 않은 젊은이들이 먼저 오게 마련이죠. 일자리는 없지만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 난, 소위 양아치들. 새로운 사람들의 성향은 들어오는지는 기존 주민들의 문화가 좌우합니다. 거기에 괴짜까지 수용할 수 있으면 혁신은 저절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거니까요.


창의적 인재를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외지인에게 관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중요한데요. 저자는 이것을 '라운드 어바웃'에 비유합니다. 라운드 어바웃은 신호가 없는 원형교차로지요. 교차로 한가운데가 진공지대 같은 원형으로 이루어지며 3차로 이상이 교차하며 신호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차를 멈추거나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양보하고 존중해야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지요. 어느 길에서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고 어느 길로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같은 생각과 규칙을 공유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체제.


초반에 언급한 안경도시 사바에가 생각나시나요? 여러 장인들을 중심으로 개성있는 안경테로 사랑받던 사바에는 중국이 저가 안경테를 생산하면서 지역경제가 완전히 산산조각났습니다. 사바에도 현재 다양한 혁신사례들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마스나가 고자에몬이라는 젊은 지도자의 초바제도*1)를 현재에 되살려 스핀오프 벤처,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활성화한 덕분입니다. '가르쳐서 독립시킨다'는 개념으로 작은 벤처들이 속속 생겨납니다. 특정 부품이나 디자인이 특화되고 그걸 조합한 독특한 제품들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종속적인 하청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민주적이고 공생하는 지역경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 초바제도 : 일종의 하청제도, 자신이 직접 모은 1기생들이 숙련공으로 성장하면 독립. 그 기술자 아래 다시 제조그룹을 만들어 거기서 제조법을 배운 사람이 독립. 수직적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게 수평적으로 경쟁해서 품질이 향상

사바에의 한 시민은 간공 제휴를 통해 현재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간호사로 일했던 그녀는 가슴주머니에 넣어둔 외과용 테이프가 자주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소해보이지만 외과환자들의 감염률을 높이는 치명적인 습관이었지요. 이를 개선할 아이디어와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여러 나라에 특허를 받고 전세계로 수출하는 의료용 외과테이프 커터 '기루루'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뒤이어 '필'이라는 목재 링거 스탠드도 개발되었지요.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고 ‘대금은 천천히 줘도 좋아’라고 여유부리면서도 일은 무척이나 빨랐습니다

어떤가요?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무엇이든 신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자가 후쿠이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래 단어들이 남는다고 합니다.

평생 현역, 평등, 사람과 사람의 연계, 부지런함

어느 하나 특별하거나 새로운 단어는 아니지만 실제 이것을 실천하며 사는 후쿠이 주민들을 보며 저자는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희망적이면서 한편 낙심도 되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민족이니까'라며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도 올라오고요. 하지만 그들도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방법은 알지만 행동하지 않았고, 모두가 적극적이거나 변화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편하게, 예전처럼, 나에게 유리하게 하고 싶은게 인지상정이었겠지요.


후쿠이 시장과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성원 모두를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요. 다만 기업이든 학교든 조직에든 반드시 영향력을 발휘하는 20~30퍼센트의 주축이 있고, 이들이 주위 사람들을 자극해 조직 전체를 움직이는 겁니다.'라고요. 어떤가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죠?


지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지역은, 사회는, 국가는 어떤가요? 변화해 볼 용기가 생기시나요. 그렇다면 여기, 후쿠이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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