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의 거주박물지

거주문화를 통해 고단하고 치열했던 우리의 근대생활사를 들여다 볼 기회

by 이진희

이 책은 우리 주거문화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다. 거주공간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다양한 사료를 통해 보여준다. 각각의 이야기는 현재의 생활이나 사회현상과 연결된다.


상가주택을 살펴보자. 초기 상가주택은 국가가 도심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상권은 상권대로 키우기 위해 종로를 비롯한 주요 시가지에 조성했다. 유진상가, 세운상가 등의 근대상가주택들이 최근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최근 지어진 주상복합과는 무엇이 같고 다른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아파트는 어떻게 쓰레기 문제를 해결했을까? 초기엔 집집마다 투입구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그 구멍으로 쓰레기를 넣으면 동 뒤켠에 설치된 보관소로 쓰레기들이 떨어진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단지 별로 집합시설을 짓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투입구에 봉지를 넣으면 압력에 의해 집합시설로 끌어간다. 최근 이 투입구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더 안전한 대안이 나오고 또 계속 변화해 갈 것이다.


장독대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일부 아파트는 마당(실외이면서 사유공간)에 있던 장독대를 아파트에 녹여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정부는 ‘요즘 누가 촌스럽게 간장과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냐’며 장독대를 없애자는 홍보를 앞장서서 하기도 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복도 옆 장독대

근대화가 얼마나 빠르고 강제적이었는지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삶보다 주거형태가 먼저 바뀌고 오히려 사람들은 적응을 강요받았다.


불란서식 2층 양옥 분양광고나 ‘아파트 한 채 마련해주면 기꺼이 첩이 되겠다’는 인터뷰는 집으로 표현되는 서양에 대한 자격지심, 과잉으로 넘쳐나는 물질만능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맨숀’이나 ‘빌라’같은 명칭이 당대에 가졌던 힘이나 단지 내에 설치된 정구장과 수영장은 허세의 끝판왕이다. 그 명칭과 시설들이 실제로는 어땠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변했는지도 재밌는 대목이다. (수영장과 정구장은 관리비가 엄청나고 사용자가 적어서 대부분 흙으로 매꿔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주차장이 들어섰다.)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젊은 여성들도 한 챕터의 주인공이다. 당시의 아파트에서는 그런 식모들을 위한 방이 공공연히 있었다. 집주인들과는 별도의 출입구로 다녀야했고 창문이 없는 최소한의 공간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영자의 전성시대> (민음사, 1974, 66쪽, 이 책에서는 119페이지)의 한 대목은 생생하다 못해 그 폭력성에 어금니가 물어진다.


"아, 식모살이라면 지긋지긋했어. 식모를 뭐 제 집 요강단지로 아는지, 이놈도 올라타고 저 놈도 올라타고 글쎄 그러려 들더라니까요. 하룻밤은 주인놈이 덤벼들면 다음 날은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아들 녀석이 지랄 발광이고 내 미쳐 죽지 죽어..... 식모살이를 네 군데나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모둑 그 모양"이었노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을 하숙치는 집에도 좀 살아봤는데,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건 뭐 악마구리떼 같았다.


발코니 확장이나 재개발, 재건축처럼 첨예한 이권 갈등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이 책은 그 뿌리를 보여준다.


근로재건대, 청소년건설단, 새서울건설단, 갱생건설단, 근로보국대 같은 단체는 행정 요직을 군인들이 차지해서 병영운영 원리를 공간에 반영했던 우리 근대의 기록이다.


1900년에 발행된 황성신문에 실린 복덕방 관련기사부터 당장 지금 창밖으로 눈 돌리면 마주하게 되는 아파트의 소소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한 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의 근대거주문화를 구경시켜준다.


재미로만 읽기는 어려웠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허탈함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끼면서 한 장 한 장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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