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수다극장>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저는 <대화만점>을 제작하고 있어요. <대화만점>은 (아마도 국내최초로) '대화법'을 전문으로 다루는 팟캐스트입니다. 느낌과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상대의 말을 공감하며 듣는 대화법, 비폭력대화(NVC)를 바탕으로 청취자들의 대화고민에 함께 머물고 있어요.
한 지자체 미디어센터에서 이 팟캐스트를 바탕으로 영화를 골라 같이 보고, '공감과 소통'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영화로 수다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인데요, 그걸 준비하며 찾아 본 영화들과 선정한 이유, 배울 점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 He sees me as I am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니까요) :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주인공 엘라이자는 여성이자 언어장애자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와 차별을 당하지만 마찬가지로 약자인 동료들과 도와가며 하루하루 살아내지요.
주인공이 일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괴생명체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줍니다. 호기심을 넘어 사랑을 느낍니다.
한편 영화 속에서 그녀와 생물체를 겁박하는 건 주로 젊은 백인 남성들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그들에게 괴생명체는 통제 혹은 제거의 대상입니다.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거나 존중할 여지가 없지요.
생김새나 조건을 떠나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데서 사랑과 공감은 시작됩니다. '물의 모양'이라는 제목에 이 메시지가 감각적으로 담겨 있는 게 아닐까요? 물의 모양은 우리가 어떻게 하려한다고 바뀌지 않잖아요. 흐르고 싶은대로 흐를 뿐.
2. I am not perfect (난 완벽하지 않아) : 아메리칸 쉐프 (원제 : CHEF)
주인공 칼 캐스퍼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쉐프입니다. 아니, ‘였’습니다. 한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기 전까지는요. 잘 다루지도 못하는 SNS에 감정을 표현했다가 더 큰 곤경에 빠지죠.
레스토랑에서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주인공은 때마침 이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분노와 고립감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고육지책으로 푸드트럭을 장만합니다.
칼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며 음식을 만듭니다. 덕분에 초심을 떠올리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치유를 경험하지요. 곁에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함께합니다.
이 영화에서 저는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의 힘을 봅니다. 상처와 아픔은 직면하지 않으면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상대를 할퀴기 쉽습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드러낼 때, 우리는 상대와 연민으로 연결됩니다. 성장할 여지가 보이고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칼이 그랬던 것처럼요.
3. There will be a piece of you in me, always. (내 마음 한켠엔 늘 네가 있을거야) : 허(HER)
이 영화의 배경은 언젠가의 미래입니다. 주인공 테오도르의 직업은 ‘편지 대필작가’로 그 누구보다도 상대에 공감하고 감정을 진실되게 표현해야하죠.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메마른 식물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갑니다. 아내와는 이혼 수속중이고 주변 친구들과도 단절되가죠.. 그러던 어느 날,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OS 사만다를 통해 관계의 따뜻함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고른, 저 한 줄의 대사는 그가 사만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아득한 사랑을 겪으며 아프게 성장한 후에 아내에게 띄우는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비록 사만다는 진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와 나눈 감정과 추억, 이별은 테오도르에게 아프지만 소중한 성장의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나 관계의 기억도 그러하겠죠.
4. I spend so much time in my mind, puffing myself up, tearing myself down. (난 나를 추켜세우거나 비난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 : 괜찮아요 브래드 아저씨 (원제:Brad's Status)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브래드는 대학 동창들의 SNS를 보며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아들 트로이는 매일 기타를 가지고 시간이나 죽이고 있어 답답하죠. 그런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를 떠난 브래드는 트로이의 작곡실력이 명문대에 입학할만큼 출중하다는 평가를 듣고 돌연 아들에 대한 시각을 바꿉니다. 그리고 껄끄러워하던 대학동창 크레이그에게 부탁해 면접기회를 얻고 내심 불편해하죠.
이 영화는 마치 SNS의 상태(status) 표시처럼 사건과 의식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조급함, 우쭐댐, 남과의 비교... 우리의 일상이지요. 어느 장면에서는 '안 돼~ 제발~ 하지 마. 하지 마. 후회할거야'라며 말리고 싶기도 합니다. 일희일비의 전형에 자아존중감 없는 브래드 아저씨를 보며, 평가하고 비교하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이제 중심을 나자신에 둬보는 건 어떨까요? ‘너’ 혹은 ‘사람들은’이 아닌 ‘나’를 주어의 자리에 두는 것부터 시작해볼까요?
이 외에도 몇 편 더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어요. 프로그램 관객의 연령대와 안 맞거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제외하긴 했지만요.
사이비 (2013)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사람의 욕망을 건드려 목적을 달성하려는 한 집단의 폭력성을 돌아보게 합니다.
인사이드 아웃(2015)
부정적이거나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의 느낌이 있을 뿐. 다양한 느낌과 욕구를 잘 알아채고 살피는 게 자기공감의 첫걸음이겠지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무기력함을 불러일으키는 관료언어와 정적 표현의 퍼레이드 속에서 다니엘 블레이크의 거칠지만 생동감 넘치는 자칼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존재감과 존중의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