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같은, 마음뿌리에서부터 힘이 생기는 소중한 에세이
나는 대학병원에 왕왕 간다. 그 곳은 예약을 해도 대기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기 쉽다. 기다리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도 어렵지만, 병원에서의 대기는 더욱 그렇다. 큰 병원일수록 위중한 환자가 많으니 분위기는 무겁고 절박하다. 진료를 받고 낫기보다 그 분위기에 몸과 마음이 더 고단해지기 쉽다. 그래서 난 병원에 가기 전에 잘 먹고, 잘 자고, 재미있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꼭 들고 간다. 이야기를 방패삼아 병과 슬픔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이 책도 그렇게 만났다. 병원에 가기 전에 도서관에 들렀는데 책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네 컵은 네가 씻어
얼마나 당당하고 재기발랄한 제목인가. 책의 크기도 자그마해서 손에 꼭 들어왔다. '기분 전환삼아 보기 딱이겠는데?' 저자가 누구인지 무슨 내용인지도 살피지 않고 섣부르게 집어 들었다. 얼마지않아 병원 복도에서 눈물콧물 다 흘릴 줄은 상상도 못하고.
저자는 비교적 최근에 큰 아픔을 겪었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상처를 보듬다보니 그 아래 한 겹 한 겹 쌓인 다른 상처들이 보였다. 그간 여러 목표를 향해 달려만 왔지 정작 본인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돌아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내가 그랬듯이.
저자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여중과 여고를 거쳐 사회에 나온 것도 같아서 그녀의 경험은 곧 나의 경험이었다. 담백하지만 묵직한 글을 읽으며 나역시 잊고있던 경험과, 사람과, 말들이 떠올랐다. 유달리 나를 무릎에 앉히길 좋아했던 태권도 도장의 관장, 대놓고 돈을 밝혔던 고1 담임선생, 학부생들을 도구삼아 자기 배를 불렸던 그 교수... 매순간의 온도와 촉감과 목소리와 눈빛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 놀라웠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은 후엔 글을 길게 적어나가기 조심스럽다. 잘 쓴 평론이 아닌 이상, 고작 나의 소회를 밝히기 위해 귀한 글을 자꾸 옮기는 것 같아서. 나의 조촐한 문장 대신 이 책의 목차를 옮긴다. 왜냐하면 이 제목들이 매 글의 마지막 한 줄이며, 저자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해야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닥 거창하거나 심오하지도 않다. 일상에서 몇 번이고 맞닥드렸지만 면전에서는 하지 못하고 혼자 이불킥했을 법한 입말들이다.
잘 가
나 아직 아파
왜 내게 이런 일이?
나 좀 도와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
고맙습니다
됐고, 생각 좀 해볼게
괜찮아, 나쁘지 않아
나랑 사귈래?
다시 만나줘
우리 헤어진 거야?
네 컵은 네가 씻어
아직 배 안 고파요
그만 좀 싸주세요
너는 네 인생을 살아
작가가 되고 싶어요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해?
네가 무슨 상관이니?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그거 좀 이상한데요
무슨 일이죠?
이 돈, 무슨 뜻이죠?
나 때문에 속상했니?
왜 안되는 건데요?
실수 좀 할 수 있지 뭐
내 것, 돌려주세요 (그 볼펜, 제 건데요)
왜 그렇게 말해요?
짜증내지 마세요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보지 마세요!
내가 미안해 할 필요 없잖아
나는 요즘 이 문장들을 일부러 소리내어 외친다. 심지어 몇번씩 반복한다. 소소한 나만의 씻김굿이다. 말아래 갇혔던 나의 억한 감정들이 조금씩 숨통을 트는 것 같다. 가벼워지다 가벼워지다 이내 공중부양했으면 좋겠다. 다시 비슷한 상황에 닥쳤을 때 툭!하고 튀어나올 수 있도록.
더불어 저자에게 감사하다. '힐링'이니 '위로'니하는 부제가 따라오는 에세이들을 모니터 중인데 어떤 책은 읽다가 저자와 편집자에게 항의 메일을 쓰고 싶을만큼 화가 난다. 자기자신은 물론이고 독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모르는지. 그 책들을 읽으며 받은 스트레스와 (위로는 커녕) 상처를 치유하기에 이 한 권이면 충분했다.
나역시 나와 저자인 미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믿는다. 그리고 힘닿는만큼 같이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