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만난 단비 같은 책
스스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자각한 것은 30대 초반이어요. 그때까지 꽤나 열심히 살았습니다. 일찌감치 취직해서 이미 7~8년 차 사회인이었고 결혼도 하고. 겉보기엔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마음은 헛헛했습니다. 가족과의 연대감이 깊지 않았고, 대인관계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지요.
내면의 고민은 더 컸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알았지요. 자존감이 높지 않다는 것을. 제가 뭘 원하는 지도 잘 모르겠고, 갈등 앞에 쉽게 지쳤습니다. 당시 일기를 보니 ‘하루라도 맘 편하게 살고 싶다’고 적혀있더군요. 뿌리는 약한데 줄기만 웃자란 식물 같았습니다. 결국 확 꺾어졌지요. 늦게 알아채고, 알고도 외면한 대가였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길을 찾아다녔습니다. 상담을 받고, 다양한 워크숍에 참석했어요. 4년 전쯤엔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를 알게 되어 꾸준히 공부 중이에요. 혼자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팟캐스트 <대화만점>을 만듭니다.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어요. 가장 쉬운 시작이 독서였습니다.
‘공감’, ‘대화법’, ‘나를 지키는’, ‘심리학’ 같은 단어에 덤벼들었습니다. 공감에 대한 감수성이 생긴 후로는 섣불리 읽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로 포장한 책이 많아서입니다. 상대를 조종하거나 이기는 기술을 알려줍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도 속이는 기만을 ‘화술’이라 칭하기도 하지요. 그저 번지르르하고 수려한 글로 가득 찬 책도 있었습니다. 그런 책들은 읽고 나면 도리어 마음이 헛헛해집니다. 이렇게 많은 여백과 예쁜 그림을 곁들이기 위해 권 당 나무 세 그루씩을 베어야 하나 씁쓸하기도 합니다.
정혜신 작가의 신간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저자의 책은 다를 거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럴듯한 말이나 이론으로 포장한 책과 달랐습니다. 조심스럽지만 탄탄하고 단오하며 따뜻했어요.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임에도 불구하고 치유자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는 2003년, 진료실에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의사라는 권위에 기대는 대신, 좀 더 동등한 눈높이에서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요. 연구소를 찾아오는 사람뿐 아니라 소외되고 주저앉은 사람들과도 마주 앉았습니다. 알려진 대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포함해서요. 그는 여러 해 수련을 거쳐 쌓은 의학지식만큼이나 일상에서의 공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적정심리학'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심리학'하면 검사를 통해 진단받거나 상담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정신의학과로 넘어가면 약물을 처방받고 일상에서 분리되어 치료를 받기도 하지요. 반면 ‘적정심리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쉬이 와 닿지 않습니다. '적정(Appropriate)'이란 단어가 막연하고 낯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남편의 작업 모자에서 봤습니다. 그는 주말마다 지자체에서 하는 <집 고치기 교실>을 다녔는데요. 교육운영주체가 ‘적정기술연구소' 였습니다.
'적정기술연구소'는 일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을 연구하고 가르쳐주는 단체라고 하더군요. 건축에 빗대 볼까요? 개인이 토목공사를 하거나 아파트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엄두도 못 낼 일이지요. 그래서 대형 건축회사가 존재하는 거고요.
집에 소소한 문제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비가 새거나, 문고리가 떨어졌거나, 벽지가 조금 벗겨졌다면 말아죠. 업자를 찾아 돈을 주고 맡겨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약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비용은 물론 시간도 아낄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직접 찾아내고 해결하는 데서 생기는 뿌듯함은 덩달아 따라오고요. 교육을 수료한 남편이 이전보다 더 애정을 담아 집구석구석을 돌보는 모습에서 자신감도 읽힙니다.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적정기술'의 시작에 대해서요. 대자본이 수익을 내기 위해 기술을 독점하고 활용하는데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거창하진 않아도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기술인 셈이죠.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더군요. '적정기술'을 찾아본 덕분에 '적정심리학'을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적정심리학'이란 첫 단추로 이 글은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책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진정한 공감이 어떤 것인지, '충(고)조(언)평(가)판(단)'을 하지 않기, 상대의 느낌과 감정에 존재 자체로 머물기 등등 정혜신 치유자는 풍성한 경험과 따뜻한 글로 우리를 이끕니다. 쉬이 넘길 수 없는 주제들이에요. 책으로 읽는다고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닙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연습이 필요한, 하나의 태도이자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얻은 통찰과 메시지에 저만의 별책부록을 달고 싶습니다. <당신이 옳다>가 전문가의 탄탄한 기본서라면, 앞으로의 글은 실행에 옮기며 좌충우돌하는 평범한 사람의 실전 편이랄까요. 제 일상뿐 아니라 라디오와 팟캐스트 <대화만점>의 제작 경험이 재료가 되겠지요.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정혜신 치유자 역시 원하지 않았을까요? 책을 '읽은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그의 글을 주제 멜로디 삼아 여기저기에서 '적정심리학'의 변주가 울려 퍼지기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