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아름다운 마음과 연구와 삶,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산문집

by 이진희

나는 이 작가를 대학시절부터 참 좋아했다. '인문'의 간판 아래 사변적이기만 한 글에 치일 때면 어김없이 그의 책으로 마음을 정화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는 신경학자가 담담하게 써내려 간 연구과정이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감탄했다.


아무리 아껴읽어도 내가 읽는 속도에 비해 그가 쓰고 번역되는 속도는 더뎠다. 어느 날인가 국내에 나온 책을 다 읽어 버렸다. 아직 한국어로 출판되지 않은 그의 원서에 도전했다. 뇌에 이상이 생긴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음악과 관련된 특이한 현상을 모은 <뮤지코필리아(Musicophilia)>였다. 내 짧은 영어로 삼 분의 일도 채 읽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을 때, 번역서가 나왔다. 그 후로는 까불지 않고 얌전히 기다린다.


이렇게 한 권 한 권을 기다리게 만든 작가, 올리버 색스가 2015년 우리 곁을 떠났다. 마지막 책 <모든 것은 그 자리에>은 원제인 'First Loves and Last Tales'가 말하듯 일상에서부터 지금의 그를 만든 유년의 기억,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와 삶, 학자로서의 경험, 환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정, 가족과 자기 자신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글에 통일성이나 맥락이 없어 보이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히려 그의 삶을 오롯이 만나는 기쁨이 차오른다. 그가 다른 책에서 보여줬던 해맑은 호기심과 삶에 대한 애착, 인간의 근원에 대한 끈질긴 관심도 물론 듬뿍 담겨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의 책을 바에 혼자 가서, 자주 읽었다. 중계방송 외근을 마치면 밤 10시 반 즈음인데 긴장이 풀리지 않아 바로 집에 가도 잠이 안 왔다. 단골 바에서 한두 시간 그의 책을 읽다 귀가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여자가 바에 혼자 있으면 가끔 남자들이 말을 건넨다. 마침 책을 읽고 있으니 걸어오는 말이 뻔하다. '무슨 책 읽으세요?' 아니면 '어떤 작가의 책이에요?'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상대방은 얼큰하게 취한 경우가 많아서 정말 궁금해 보인 적은 많지 않다. 그가 아무리 멋졌어도 올리버 색스가 풀어놓은 아름다운 세계에 맘껏 빠져있는데 방해해오면 짜증이 났을 거다.

'올리버 색스요' 짧게 대답하고 돌아가기만을 바랬다. 그 날 따라 음악이 커서 대답이 잘 안 들렸나 보다.

'네? 누구라고요?'

'색스요, 색스! 올리버 색스!'

'그렇게 안 봤는데...' 하는 눈빛이다. 책을 뒤집어서 작가 이름을 보여주고, 얼른 웨이터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바에 혼자 책 읽으러 갈 일이 별로 없지만 그의 책을 보면 그 밤이 떠오른다.


아득한 저 위에서 인간을, 지구를 지켜보고 있을 올리버 색스를 기억한다. 과학박물관의 주기율표에 압도된 어린 그를, 부패한 갑오징어를 수습하는 열두 살의 그를, 점점 서가가 좁아져가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잊고 몰입했던 그를, 임종을 앞두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고 또 긍정하는 그를.


책의 마지막에 그는 말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며, 지금이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좀 더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만약 그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치열한 연구, 저술활동이 없었다면 이 말은 아득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나마 계속 연결될 수 있어 기쁘다. 올리버 씨, 부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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