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꿈이 이뤄지기를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 장수연

by 이진희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직업을 소개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대한민국에 라디오 PD는 300명 남짓입니다. 그나마도 신규채용을 거의 하지 않아 매년 줄어들고 있죠. 말하자면 이 직업은 '멸종위기종'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있는 라디오 PD를 직접 보실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으실 거예요. 여러분 오늘 귀한 구경하시는 겁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엄살이 조금 섞였을지언정 사실이다. 몇 년 전부터 오디오 콘텐츠가 부흥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라디오 산업은 여전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종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업종의 동료이자 후배인 장수연 PD가 두 번째 책을 내놓았다. 지난 책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가 엄마로서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책은 라디오 PD 장수연의 이야기다. 소소하면서도 고단한 제작 일상과 틈틈이 끼어드는 생각들, 오랜 고민과 묵직한 문제 제기까지. 어떤 글은 주말 오전 차를 마시며 조잘조잘 떠는 수다 같고, 어떤 글은 어쩌다 새벽까지 이어진 3차 정도의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 같았다.


일하는 방송국은 다르지만 연차가 비슷해선 지 내 얘기 같은 글이 많았다. 허술했던 신입사원 시절도 떠오르고, 나 자신에게 혹독해서 멋지지 않았던 시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럴 때면 책을 잠시 덮고 충분히 머물다 다시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너무 찰 지고 재밌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육아를 하는 동안 일과 회사 생각이 저 멀리 달아나 있었는데 이 책이 잠시나마 라디오 PD인 나를 생생하게 소환해주었다.


휴직하기 전, <조충현의 럭키세븐>을 론칭했다. 프로그램 이름에 들어간 숫자처럼 아침 7시에 시작한다. 이 시간대엔 주로 직장인들이 출근하며 들을 거라 예상하고,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아침 7시는 밤샘 근무자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출근하고 싶지만 아직 할 곳이 없는 취준생들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시간이며, 부모들이 사춘기 아이들을 등교시키며 차 안에서 대화 거리가 없어 어색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청취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잠시 딴 이야기지만 한 청취자의 문자가 생각난다. '어제 제가 차를 주차장 어디다 세웠는지 모르겠어요. 20분째 키 누르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러다 지각할 것 같아요'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연을 소개하자 '비슷한 위치의 다른 층에 가보라', '어제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감고 이미지 트레이닝하듯 떠올려보라', '어떻게 해요 발동동’, ‘나도 그런 적 많은데 그냥 단념하고 얼른 택시를 타는 게 낫다', '차 대면서 꼭 사진을 찍어둬라' 등등 문자가 이어진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차를 세운 본인도 기억 못 하는 차의 위치를 함께 찾아주려 노력하고,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 기어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사연을 보낸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을 때, 선한 마음을 조심스레 꺼내 놓고 싶을 때 라디오는 아주 순순한 통로가 되어준다. 수 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이 책은 그런 라디오를 최전선에서 경험한 기록이다. 라디오 PD를 지망하는 사람이 (혹시 아직도) 있어, 어떤 직업인지 궁금해한다면 '이 책 한 권이면 충분할 거야’며 권해주겠다.


출판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을 글들이 사이사이 보인다. 덕분에 나도 많이 돌아보고, 앞으로 신경 써야 할 점들을 배웠다. 누군가 읽고 상처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고민하고 다듬은 정성이 엿보인다. 그 마음이 참 곱다.


꽤 오래된 것 같다. 라디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형편이 어려운 업계사람들의 대화는 종종 우울해진다. 요즘은 기승전 유튜브다. 지루한 일반론이나 누군가에 대한 탓이나 염세적인 결론에 다다르는 것도 지쳤다. 본인은 여전히 잘 나간다는 듯 왕년의 낭만적인 레퍼토어를 쏟아내는 사람도 피한지 오래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라디오와 라디오 PD라는 직업을 똑바로 쳐다보며 가슴 설렜다. 그건 아마도 이 책에 많은 꿈과 약속과 노력과 진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일 거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조심스럽지만) 책의 서두에 그가 라디오 PD가 되기 전 한 작가에게 받은 약속이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라디오 PD가 되었고, 그 작가는 약속을 지켰다. 이 대목을 읽으며 어찌나 가슴이 뻐근했는지 모른다. 그런 가슴 뻐근한 일들이 내 삶에, 그의 삶에, 당신의 삶에 이어졌으면 좋겠다.


밤섬 음악제도 열렸으면 좋겠고, 회사가 장유유서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조직이면 좋겠고, 내가 직장이나 직함이 아니어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고, 선배들과 동료애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고, 후배들을 여유롭게 지켜보며 잘 도와줄 수 있는 선배면 좋겠다. 일과 가정의 균형도 잘 잡았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들려준 그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한동안 덮어두었던 나의 꿈들도 이어 붙여본다. 우리의 더 많은 꿈이 이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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