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 눈칫밥 먹는 서러운 80년대생 기사를 읽고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722004002
엊그제 지인이 이 기사를 공유해 주었습니다. 15년 차 직장인이자 80년대생인 저에게 한 문장, 한 문장이 매우 와 닿았습니다. 70년대 이전생 들과 '나는 다르다 (혹은 달라야 한다)'고 선을 긋는 한편, 90년대 생들의 말이나 행동이 때때로 의아하기도 했거든요. '그나마 네가 젊고, 쟤네들과 잘 통하지 않느냐'며 중간관리자 내지는 의사소통 역할을 요구받는 일도 점점 늘어나고요.
이 글은,
Q1 : 상사에게 의사소통 역할을 요구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할까?
Q2 : 낀세대로서 90년 대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두 질문에 대해 비폭력대화 관점에서 고민해 본 제 나름의 대답입니다.
Q1 : 의사소통 역할을 요구받을 때 어떻게 대처할까?
디지털 부서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팟캐스트 기획안을 보내왔습니다. 팀장인 선배는 기획의도부터 이해가 안 된다고 반려했습니다. 제 의견은 '일정기간이라도 제작할 기회를 주자'였습니다. 큰 예산이 드는 아이템도 아니었고, 이전에 없던 콘텐츠인 데다가 타깃과 기획의도도 분명했거든요.
타깃이 2-30대 여자였기 때문에 쉰을 목전에 둔 팀장에게 기획의도를 이해시키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르면 말 나온다. 우선 파일럿을 만들어보게 하자'라고 팀장을 설득했죠. 누구도 사내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예산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며칠 뒤에 벌어졌습니다. 파일럿을 5분 남짓 들어보고는 말하더군요.
야, 이거 여자애들 몇 명이 하니까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모여서 이런 이야기 떠드는 걸 누가 듣겠니?
아직 얘가 경험이 적어서 감이 없는 것 같으니까 네가 좀 잘 가르쳐!
이 말을 그 후배가 직접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추측해봅니다. 납득이 되지 않아서 의아하고, 의욕이 꺾여 실망스러울 것 같았어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 선배라 생각하고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건 뉴미디어 콘텐츠라서 기존의 지상파 프로그램 문법과 다른 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타깃이 2-30대 여자니까 부서원 중에 거기 해당되는 사람들의 모니터 의견을 들어보자고요.
설득에 실패했습니다. '경험 없는 애'는 가르쳐 줘야 하는 대상이고, 왕년에 성공해 본 내 말을 따르라는 게 팀장의 요지였죠. 이대로 전달하긴 어려웠습니다. 후배에겐 사실 반, 격려 반을 잘 버무려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죠. '낙심되겠지만 좀 기다려보자. 기회가 있겠지'
'시간'은 우리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상사가 어지간히 열린 사람이 아닌 이상, 논리적으로 설득하긴 쉽지 않습니다. (본인의 능력인지 시대의 흐름인지는 차치하고) 성공해 본 경험이 있고, 의사결정 권한까지 쥐고 있다면 결국 본인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답정너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어설프게 접근해봐야 '내가 예전에~',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군소리만 듣습니다. 그나마 제가 사용한 '사내 평판'이나 '꼰대 포비아 - 자꾸 그러시면 꼰대라고 손가락질받아요' 정도를 시도해 볼 수 있겠죠.
실제로 저는 그 후배의 기획안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그 상사가 승진(!)해서 자리에 없는 틈을 타서 론칭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새 팀장님의 성향에 맞춰 '사내 평판 - 이걸 론칭하면 팀장님의 성과로 보이고, 해당부서에서 팀장님을 열린 사람이라고 좋게 평가할 거다. 그러니까 고고' 카드를 썼죠.
팀장은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바뀌고 저도 이제 다른 부서로 옮겼지만 그 팟캐스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 후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작하며 성장하고 있고요. 2-30대 여성 청취자들은 이 콘텐츠에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윗세대 선배나 상사들이 아무리 <90년생이 온다>를 돌려 읽어도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큰 기대하지 말고 그들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빠릅니다. 체면은 살려주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밖에요.
자꾸 '네가 그나마 젊고...'라면서 부려먹으려고 하면 우리도 '곧 마흔'임을 주지 시켜줍시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오래 봐 와서 우리 나이도 상당하다는 걸 잊었을 수도 있어요.
Q2 : 낀세대로서 90년 대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저 기사를 클릭한 대부분의 독자는 이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착한'이 붙을지언정 꼰대가 되고 싶은 80년대생은 없을 테니까요저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욕구와 느낌을 있는 그대로 궁금해하고 수용하려고 합니다. 공통점을 찾아서 어필하거나 어설프게 공감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 인용된 인터뷰를 옮겨봅니다.
한모(29)씨는 “바로 위 선배가 ‘나도 부족했지만 이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다.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건 격려도 아니고 질책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자기 기준대로 나를 평가하면서 좋은 사람인 척하니 더 기분이 나쁘다”라고 덧붙였다.
보세요. 어설프게 '너와 나는 같은 편이야'라고 해봤자 통하지도 않아요.
혹시라도 그들이 걱정되거나 그들의 말과 행동에 기분이 나쁘다면, 그들을 비난하거나 평가하기 전에 내 느낌과 욕구부터 돌아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일한 시간이 90년대 생에 비해 물리적으로 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경험이 (그들에게) 유용한가'라고 되묻는다면 결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을 뿐, 그 지나간 경험이 현재 혹은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일은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콘텐츠가 유통되는 플랫폼이 몇 달 사이에 없어지고 생깁니다. 새로운 형식과 문법의 콘텐츠가 매일 등장합니다. 뭐라도 시도해 본 사람이 곧 선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배들은 호시절 운운하면서 왕년의 성공경험을 내세울 수 있다 칩시다. 우리는 그런 호시절도 없었습니다. 겸손하자고요.
더불어 저는 호칭도 신경 씁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편하게 일상을 나누는 후배가 아니고서야 말을 놓지 않습니다. 얼마 전, 모 아나운서가 페이스북에서 '얘들아'로 글을 시작했다가 문맥이나 의도와는 별개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던가요. 나이나 연차가 곧 권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도 불편하게 느꼈음을 잊지 맙시다.
저는 90년대생이 무슨 별나라에서 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와 다른 경험을 하며 자라서 우리와는 다른 욕구를 가졌을 뿐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중시하는 가치는, 실은 우리도 원하지만 지금까지 내세우지 못한 것들입니다. 자율성, 존중, 독립성, 소통, 능력... IMF와 금융위기를 지켜보며 쫄아서 어느 정도 포기한 욕구들이지요. 90년대 생은 앞으로 자기들만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은 포기하고, 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해결책을 찾을 거라고 믿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 한, 괜한 오지랖 떨지 말자고요.
윗 세대들의 수족이 되어 참고 견딜 필요도, 우리 같지 않은 90년대 생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꼰대 짓을 할지언정 여유 있는 선배 세대들이 부럽고, 당장은 막막해 보이지만 가능성이 있는 90년대생도 부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