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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언니 Feb 22. 2020

소통하고 싶어서 경적을 울립니다

눈 오는 주말 아침, 주차장에서

일주일 전, 예술의전당에 아침 일찍 전시를 보러 갔다. 아이를 맡기지 않는 한,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시는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다. 각자 한 명 씩 안고 잘 재워서 입장하면 된다. 물론 보채면 냅다 뛰쳐나갈 출구를 제일 먼저 확인해 둬야하지만 말이다.


아이들과 다니려면 사람이 없는 시간이 유일한 기회다. 개장 5분 전에 도착해 부지런히 관람을 마치고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에 이르러 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히고 유아차를 접어 차에 넣으려면 적어도 10분은 걸린다. 마침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근처에 흰색 외제차가 멈춰 섰다.


"나가요"

의문문도 평서문도 명령문도 아닌 애매한 톤의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차에 앉은 채로 멀리서 말했기 때문에 나는 하던 대로 계속 아이들을 돌봤다. 이윽고 '빵!' 경적이 울린다.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우리에게 울렸다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아가를 카시트에 앉힌 직후라 벨트를 채우고서야 다가가서 물었다.

 

"지금 저희한테 경적 울리신 거예요?"

창을 조금 내린 중년의 여자 운전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이 있어서 카시트 채우고 유아차 실으려면 시간이 걸려요. 기다리실 거면 기다리시고 아니면 다른 데 대시죠" 애기 띠를 미처 풀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니, 자리가 없어서 그렇지...'라며 짧게 말끝을 흐린다. 물론 자리는 많았다. 눈 오는 주말 오전, 예술의전당 주차장은 결코 붐비지 않는다.


그리고 돌아와 아가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유아차 라이너를 정리하고 있는데 또 경적이 울린다.

빵! 빵!


"아이들이 있어서 시간이 걸린다고요.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드리려고 제가 아이들을 대충 앉히거나 유아차를 두고 갈 순 없잖습니까! 전 안전하게 천천히 준비해서 나가고 싶어요."

화가 났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빠지지 않았다. 쓰면서 보니 억한 심정에 비극적 표현을 한 점은 아쉽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그 당시 떠올랐던 것은 안전과 여유-을 분명히 말하고 돌아서려는 차, 반대쪽에서 다른 아가를 내리고 있던 남편이 물었다.

"아까부터 우리한테 경적 울린 거야?"

"응"

그러자 남편 역시 아기띠를 한 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문제의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미안해요. 몰랐어요'부터 시작한다. 한국에서 자그마한 여자와 덩치 큰 남자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 다르다.


남편은 '경적'에 예민하다. 운전 중에도 경적을 울리는 차를 보면 매너가 없다고 화를 내는데, 사람에게 울리는 행위는 오죽할까.

"이 보세요! 경적은 사람한테 울리라고 만든 게 아닙니다. 차끼리 피치 못하게 의사소통을 할 때 쓰라고 있는 거예요. 어디다가.... (이 이후는 잘 안 들렸다. 본인 말에 따르면 흥분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고.)


언성이 높아지자 아이들이 운다. 아까 한 말로 나는 어느 정도 내 표현을 다 했다 싶어 아이들을 돌봤다. 남편은 몇 분 지나 약간 씩씩 거리며 돌아왔다. 그 차는 뒤로 조금 물러나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차분히 출차 준비를 해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남편에게 물었다.

"아까 하고 싶은 이야기 충분히 했어?"

"아니, 흥분해서 제대로 못했어."

"우리 뭐가 충족되지 않았지? 나는 안전과 여유를 말했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아직 짜증 나고 화 나"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는 존중!"


우린 안전하게 아이들을 돌보고, 여유롭게 출차 준비를 하고 싶었다. 물론 주차장의 질서를 깨거나 민폐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우리 자리에 차를 대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를 해주길 바랐다. 이렇게 우리의 욕구를 잘 돌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차에 남편이 말했다.


"근데 경적을 왜 울렸냐고 물어보니까 그 운전자가 뭐라는 지 알아?"

"뭐라는데?"

"'소통하고 싶어서' 울린 거래"


도로는 눈이 녹으며 먼지가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소통'이란 단어가 그 길바닥 어딘 가 떨어져서 젖고, 더럽혀지고, 짓밟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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