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소녀가 사랑한 것들 06 | 몽연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말이 갖는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놀랄 때가 종종 있지만 어느정도 감이 잡힌 것 같다. 말이라는 것은 어쩌면 음악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중학생 시절엔 이 문장의 깊이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등학생이 되고 깨닫게 된 계기가 딱히 있는 것을 아니다. 어느 순간 느껴졌다. 말의 힘이 엄청나구나.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주변에 중학교가 있어서 그 학교 학생들이 거의 다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은 학교였다. 가끔 다른 중학교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바로 옆 중학교에서 올라온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1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게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새로운 곳에 오니 말을 더 조심스럽게 하게 되었고 새로 사귄 친구들도 말을 막하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나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번 긴장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생 시절 생각 없이 말을 뱉던 버릇은 사라지고 어떻게 해야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고민하고 말하는 습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긴장한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들과 더 친해졌다는 생각에 무심코 나오는 말들이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전부 알고 있었지만 무서웠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사과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두려워서 피해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너무 필터 없이 말하는구나. 솔직한 게 아니라 기분 나쁘게 말하고 있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신중히 고민하는 것을 연습하고 스스로 사과하는 법을 공부하고 있다. 무심코 뱉는 말일지라도 상대방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같은 말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장미꽃이 될지, 그 밑에 가시가 될지가 결정된다. 말이 가진 힘을 깨닫고 그 힘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말은 감정과 비슷하다. 감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해야 하듯이 말에 이끌려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를 직접 선택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만드는 것, 그 말이 혹여 누군가를 찌르는 말은 아닌지 검토하는 것. 이런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말하는 습관 하나에 그 사람의 인성이 달라진다. 지금이 바로 나의 말하는 습관은 어떤지 돌아볼 시간이다.
과연 나는 예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는가?
예쁘게 말하려면
내가 말하기 습관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에는 조울증 약이 한 몫했다. 약을 먹고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약을 먹고 예민해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항상 예민해져 있는 게 기본값이었는데 약을 먹고 많이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내가 그동안 어떻게 말하고 다녔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이제라도 말하는 습관을 달리 해보자고 결심했다. 이렇게 보면 꽤 오래전부터 조울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들에게 배운 게 많다. 실제로 말을 예쁘게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며 고민 상담도 했었다. (그러자 이모티콘을 붙이라는 재밌는 답변을 들었다.)
모든 게 어려웠던 나는 ‘공감하기’부터 시작했다. 상대방의 말에 공감한 뒤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것보다 훨씬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공감을 먼저 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상대방이 훨씬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결정적으로 공감은 상대방의 말을 내가 잘 듣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는 정도로 공감했다면 레벨을 올려 ‘말하는 공감’을 시도해 보자.
상대방이 꺼낸 주제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마치 마인드맵을 그리듯이 확장해도 좋고 한 가지 주제를 꼽아 더 깊이 들어가도 좋다. 말하고 있는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 경험,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등등.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시 넣어두고 상대방이 한 말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말 끊지 않기’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언제 해? 할 수도 있지만 대화라는 것은 의외로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누가 먼저 말하는지, 누가 다음 차례로 말할지 대화의 순서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먼저 말을 꺼낸 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그다음에 내가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의 말을 끊고 내 말을 끼워 넣으려고 하면 대화 순서가 엉망이 될뿐더러 상대방의 기분까지 망치는 대화가 되어버린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아, 근데 아까 말이야.”라고 하며 주제를 돌려 돌아가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습관 만들기
이 모든 일을 한 번에 다 할 순 없다. 처음엔 간단하게 공감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점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습관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말은 대게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말이 가진 힘에 비해 나도 모르게 말을 뱉는 경우가 잦다. 툭 튀어나오는 말은 보통 우리를 후회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 말은 하지 말 걸’하고 말이다. 그런 말들이 실수이든, 진심이든 중요한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뱉은 말이라는 것이다. 말하기 습관을 잘 들여야 툭 튀어나오는 말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나는 매일 붙어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 덕분에 금방 습관을 들일 수 있었다. 매일 생각하고, 말하고, 공감하자는 말을 속으로 외우며 지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 실수로 뱉는 말들이 상당하다.
습관을 만드는 일은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게다가 말이라는 것은 너무 무거워서 무거운 돌을 뒤집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밀고 굴리고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그 무거운 돌이 뒤집히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습관 만들기가 잘 되지 않을 때, 지금 이게 무거운 돌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이 무거운 돌을 뒤집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루에 한 번씩은 온 힘을 다 해 밀어야 비로소 넘어가는 돌 말이다.
나의 오늘 이야기가 그대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