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aquah is bear country
지난해 여름 집 앞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울고 소리 지르며 집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놀란 마음에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색 커다란 생명체가 어슬렁어슬렁 집 앞을 지나쳐 간다. 살면서 여태껏 본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곰이었다.
바로 앞집 3살 배기 꼬마가 아직 밖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터라 집으로 돌아가라 소리쳤다. 다행히 엄마가 나와 아이를 들쳐 안고 가까스로 집으로 들어갔다. 곰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구급차 한대가 적막한 집 앞 골목을 요란하게 지나쳐 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골목으로 살금살금 나가보니 불과 30m 떨어진 이웃집 앞에서 한 성인 여성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성인 남성과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아이가 내 어깨를 툭치며 그곳으로 내달려 갔다. 바깥에 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과 아들이었으리라.
내가 사는 동네는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30분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이사콰(Issaquah)라는 작은 도시다. 시애틀에서 바라보면 제법 산세가 시작되는 산중턱 마을이라 할 수 있겠다. 북미 대륙에는 크게 두 개의 산맥, 서부 로키와 동부 애팔래치아가 있고 그 다음으로 서북미에 캐스케이드(Cascade) 산맥이 있다. 로키가 태백산맥이라면 캐스케이드는 소백산맥 정도 될까. 이사콰는 캐스케이드 산맥에서 가늘게 갈라져 나온 그 어느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산동네 도시다.
산이 있다고 다 곰이 있는 건 아니다. 북미 대륙에는 크게 세 종류의 곰이 사는데 일단 북극 지방에 사는 가장 큰 북극곰, 갈색의 비교적 크고 무서운 그리즐리(Grizzly), 마지막으로 이중 가장 작고 겁 많은 흑곰으로 나뉜다. 멀리 사는 북극곰을 차치하면 그리즐리와 흑곰이 남는데, 이 중 그리즐리의 서식지는 알래스카와 서부 캐나다로 집중되어 있고 개체수도 북미 대륙 합쳐서 5만 마리밖에 되지 않는 멸종위기종이다. 캐나다도 아닌 미국 여느 도시 근처에서 그리즐리를 마주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본 것은 분명 흑곰이었다. 북미 전역에 80여만 마리나 살고 있다고 하니 산세가 좀 있다 싶으면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 놈은 북극곰, 그리즐리 등 다른 놈들과 다르게 과일, 풀 등 대부분 식물성 먹이를 먹고 유독 겁이 많다. 상대가 도발을 하지만 않는다면 지레 알아서 도망간다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이웃집 주민은 심하게 공격을 당한 것 같아 여러 걱정이 앞섰다. 아마도 그놈의 배가 너무 고파서 예민했거나 아니면 어떤 정신적, 신체적 질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야생은 야생일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동네 초등학교의 상징 동물은 흑곰이 아니라 그리즐리다. 옛날에 그리즐리 개체수가 많았을 때는 캐스케이드 산맥을 따라 내려와 이 지역까지도 적잖이 출몰했으리라 짐작한다. 2, 3미터의 커다란 몸집에 공격성이 강하고 활달하여 이곳 사람들에게 꽤나 강인한 동물로서 인상을 심어줬을 것이다. 한국의 학교들이 호랑이나 사자를 상징으로 많이 쓰듯 이곳 동네에서는 그리즐리를 그렇게 귀하게 여겼는 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이사콰 시정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지역 홍보 활동 내용이 인상 깊었다. 공원 안 새로운 쓰레기통을 설치하였는데 이름하여 “곰 방지 쓰레기통(bear-proof trash can)”. 곰이 음식물 냄새를 맡고 공원 쓰레기통으로 찾아오거나, 뒤지고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쓰레기통 상단을 묵직하게 막아놓은 것이 특징. 측면 틈새로만 쓰레기를 집어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고, 상단 테두리에 그냥 쓰레기를 올려놓고 가면 말짱 꽝, 안으로 쏙 넣어야만 한다. 부디 곰과 인간 모두에게 도움 되기를.
한국에서 건너온 속세에 찌든 한 직장인으로서 지난 곰 출몰 사건을 겪고 바로 들었던 생각은,
한국 같았으면 분명 동네 부동산 가격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당연히도 이곳 워싱턴주 이사콰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계절마다 코요테, 사슴, 뱀, 토끼, 다람쥐, 종달새가 집 앞을 드나들어 심심치 않은 생활을 하며 지낸다. 자연 친화적인 삶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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