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래'라는 말에 잠식되지 않는 법
*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기관, 기업, 지명, 사건 배경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인물이 많지 않은 팀에 들어가는 건 행운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새로 꾸린 팀이 더 적응하기가 쉽다고. 회사의 히스토리를 아는 팀원이 있고, 임원들의 마음을 이미 잘 읽는 동료가 있다면 더 편할텐데 왜일까? 바로 텃세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말이 맞아'때문이 아닐까싶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나쁜 의도 없이 기획과 창의력을 죽인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물론 악질의 텃세와는 그 해악성이 비교할바가 안되지만, 모든 글을 눈물로 채울 순 없으니 텃세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겠다.
회사를 제법 오래 다닌 팀원 A가 있다. 이 팀원은 몇년간 회사를 다니며 이곳의 변천사를 나름대로 지켜봐왔으며 위에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입맛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모든 회사업무는 보고와 승인을 바탕으로 하는 법.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윗분들의 취향을 맞추는 것에 승인 여부가 달려있는 경우가 왕왕있다, 아니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인물 팀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맞추게 된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제시를 해도 '그거는 XX 상무님이 싫어하시는데' '지젤리씨, 이게 그분이 좋아하시는 보고서 포맷이에요'라며 금방 거절당하곤 했다. 실제로 A의 말과 동일하게 결과가 나오기도 했기에, 더욱 수긍하게 됐다. 점차 나중에는 본인의 업무가 아닌 내 분야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있고, 몇번의 업무 경험도 있었기에 다소 불쾌했지만 그 얘기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궁극적으로 A의 말이 맞을 거란 걸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로만 여겼으니까.
그렇게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힌 나의 아이디어 조각들과 함께 어느새 나의 상사처럼 군림하는 A가 있었다. 순진하게도 나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라고 생각하며 마냥 고마워했지만, 그건 참 어리석었다. 그의 말이 전부 정답이기에 나는 그대로 따르는 게 순리였고, 어느새 당연하게 A가 사전승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업무 지시도 A가 하고 나의 업무 범위도 A가 관여했다. 일상적으로 업무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요청하지도 않은 피드백을 던졌다. 다 끝나고서야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챈 나였지만, 허망하게도 딱히 도리가 없었다. 윗분들도 오래 본 A를 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기분 나쁘고 다들 짝짜쿵이 잘 돌아가다보니 매번 내 속만 복잡했다. 이게 맞나?
여느때처럼 이런저런 브레인스토밍을 하던 때였다. 서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던지며 괜찮으면 적고 아니면 넘기거나 대안을 만드는 시간이었는데, 이번에도 내가 야심차게 낸 아이디어들이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분명 옳고 그름이 아니라 본인의 취향에 따라 갈리는 문제인 것 같은데도 A는 확신에 차서 그건 아니라고 했다. 나도 아이디어다보니 정확한 실체가 없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에 갸우뚱하며 A의 말을 들었다.
'왜 해보지도 않고 본인이 거절을 하지? 담당자도 아니고 사수도 아니고 결정권자도 아니고 예산 승인하는 부서도 아닌데?'
내 안에서 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굳이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서 일단은 냅뒀다. 이 일이 세 번 정도 반복되다가 마지막 기획은 정말 아니다싶어서 끈질기게 얘기했다. 결국 둘 다 감정만 조금 상한 채로 평행선을 달렸고, 끝까지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한 나는 홧김에 기획안을 썼다. 윗분들이 싫어한다고 했던 기획, 우리 회사랑 핏이 다르다고 했던 그 아이디어, 허무하게도 바로 승인 받았다. 승인메일도 짧고 간단했다. 여태 내 감정은 왜 상했으며 그 아이디어들은 왜 제출조차 못했지?
이뿐만 아니라 회사내 조직문화 또한 그랬다. 우리 회사에는 여전히 잔재하는 꼰대문화들이 몇있다. 타회사에서는 분명히 하지 않는데 우리 회사에만 있는 이상한 것, 한번 논리적으로 얘기해보았으나 A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기는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이런 곳이고 이런 얘기하면 윗분들한테 밉보여요" 라고 말했다. 이 대화 또한 수차례 반복되었다. 아마 A는 정말 동료가 윗분들로부터 큰 미움을 받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도저히 부당함이 납득되지 않아서, 그 중 정말 견디기 힘든 하나를 집어서 상사와 얘기했다. 깜짝소식. 알고보니 여기는 '원래' 이런 곳이 아니었다. 다 어느정도 잘못됨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관례이자 습관이 되어 그냥 그렇게 굴러갈 뿐이었다. 얘기를 하니 바뀌었다.
물론 이렇게 쉽게 썼지만 문화를 바꾸는 과정 또한 결코 순탄치 않았다. A도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회사 또한 바뀐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외부 환경이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고 법과 인식이 변하면서, 이곳도 변한다. '원래' 그랬을지라도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니 고인물 동료의 충고를 참고하되, 그게 곧 법이라고 생각하며 끌려다니지 말길. 남의 말은 철썩 같이 믿고 도와주면 다 고마워하는 이 순진함.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라질 수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