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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Nov 03. 2021

작년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났었다

생일 다음으로 중요한 "나의 날" 1주년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


종종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뱃속에 거지가 들어있다'는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작년은 자서전을 쓰며 나를 끊임없이 탐구하던 한 해였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무엇을 싫어하지, 어떻게 생각하지, 어떻게 행동하지 등. 덕분에 원래 심리학을 좋아했지만, 더욱 심리학책을 파고들게 됐다.

그러다 '나'를 찾는 심리학책이 공통으로 말하는, 내 안의 존재를 찾았다.


바로, 어린 나였다.


유럽여행에서 봤던 어린 아이들

어린아이의 나

용어는 조금씩 달랐지만, 의미하는 것은 같았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않은 욕망, 결핍된 무언가가 어른이 된 사람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걸 '어린아이인 내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표현한 것이 가장 와닿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인정을 잘 받지 못한 아이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다는 것이다. 표현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비난이 두려워 눈치를 많이 보거나, 감정표현이 서툴 수도 있고, 남을 깎아내리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랬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은, 대부분 남의 눈치를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책도 읽고 상담도 해보면서, '눈치'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부모님이 있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를 자유롭게 키웠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데에 부모님의 덕이 참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변함없다.

그러나 단 하나, 부모님은 사랑 표현에 서툴렀다. 경상도 사람 아니랄까 봐


어쨌든 난 다 컸다. 지금 와서 부모님 탓해봤자 바뀔 것은 없다. (탓할 것보다 감사할 게 더 많은 것도 있다) 이제 내 삶은 내가 꾸려가야 한다. 내가 불편한 게 있으면 스스로 바꿔야지.

문을 여니 멋진 풍경이 보였던 곳

애도

어떻게 내 안의 어린아이를 '처리'할 수 있을까? 다 큰 어른인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계속 용인하긴 싫다. (가만히 놔둬도 본인이 불편함만 느끼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평화적인 방법은, 사랑해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어르고 달래 아이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자.

"아주 속상했겠구나, 이해해. 너는 좀 더 사랑을 많이 받고 싶었겠구나. 네 탓이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토닥토닥)"

그럼 항상 어릴 것만 같던 어린아이도 철이 들겠지?


말은 쉽게 해도, 실제로는 쉽지 않고 오랜 과정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6개월이 걸렸다.


내면의 아이를 인정하는 과정은, 어린아이에게 '더는 네가 원하는 건 이룰 수 없어'하며 현실을 지각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나는 다 컸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 유형도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이다. 설령 같은 형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미 생겨버린 과거의 상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상처를 인정하고 더는 흉지지 않게 치료할 뿐.

그 과정에서 슬픔이 느껴진다고 한다. 과거의 상처를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면,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어 버린다. 어린아이로 남아서라도 그토록 갈망하던 욕구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니, 얼마나 슬플까. 그 감정을 애도라고 표현하더라.


작년 오늘, 나는 애도를 경험했다. 자취방, 늦은 밤. 내 안에 어린아이와 대화하다가 눈물이 주르루르루룩 흘렀다.


오묘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기리기 위해, 오늘을 '나의 날'로 지정했다.

노을과 파도. 바다와 바위. 오묘하다.

1주년

아이 키우기가 그렇게 어렵다더니. 정말 많이 큰 것 같은데, 여전히 아이다. 언제 키워서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나.

나를 상담해주시던 상담사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를 인정하고 애도의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한 아이가 한순간에 바뀔 수가 없다고. 1~2년은 우습고 길면 10년, 어쩌면 그보다 오래 데리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우리 애는 아직 초등학생인가보다)


그래도 정말 많이 달라졌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본다고 말할 순 없지만, 눈치를 볼 때마다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조절할 수 있다.' 나의 감정과 반응을 부정하지 않고, 조금은 쿨하게 인정한다. 그러니 사는 게 조금 더 편해졌고 행복해졌다.


'나의 날'을 선포하며, 매년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쉽게 올해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운다고 아침부터 바쁜 하루였다. 거창한 건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쪼개 글로나마 오늘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 다행이다. 1주년 축사 같은 느낌으로.



내년엔 어떤 내가 되어있을지 또 궁금하다.

더 자라있을 나를 상상하니, 육아의 기쁨이 이런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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