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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Aug 23. 2021

비 맞으며 걷던 오름,
마냥 좋았을까?

비 내리는 오름길에서, 나의 소수점 인생에 대해

비 온댔는데 왜 안 오지?


어젯밤에 "내일은 비 내리는 숲길을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꿈나라로 갔지만, 막상 아침이 되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다행히 정오 즈음에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그제야 차를 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물영아리오름

이름만 들으면 물이 담긴 항아리가 떠오르고,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를 것 같은 오름이다. 하지만 느낌과는 조금 다르게 '영아리'는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고, 그 앞에 '물'이 붙은 것이다. 분화구에 물이 있어서 물영아리오름, 그 옆엔 물이 없는 '여문영아리오름'이 있다.

어쨌든, 왠지 비가 내릴 때 가야 할 것만 같아, 이번 비 오는 주말은 물영아리 오름에 가보기로 했다.


비가 오면 옷이 젖을 테니 우비를 걸치고, 가방엔 방수천을 둘렀다. 빗물에 시야가 가려질 안경을 벗고 렌즈를 꼈고,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었다. 나는 완전무장을 했다. 마치 아이언맨이 된 것 같아, 퍼붓는 빗줄기와 고인 진흙탕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비가 꽤 왔는지, 물영아리 오름길은 시작부터 물에 잠겨있었다. 고어텍스 등산화는 방수 능력이 뛰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신던 등산화가 아직 짱짱하다. 중학교 이래로 커지지 않은 발에 감사하고, 좋은 등산화를 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쪼잔하게 물이 고이지 않은 길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밟으며 걸을 필요 없다. 첨벙첨벙, 나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고어텍스도 만능이 아니었고, 어느새 양말이 축축해졌다. 오히려 등산화 안으로 들어온 물이 밖으로 빠지지 않는다. 결국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아 조심조심 까치발로 걷게 되었다.

물영아리오름 습지이자 분화구

오름의 분화구이자 정상인, 물영아리오름 습지는 생각과 조금 달랐다. 한라산의 백록담 같은 호수를 떠올렸지만, 그와 달리 풀이 무성하게 자라 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넓은 들판에 군데군데 물이 고인 느낌이었다. 오리 한 마리가 습지를 유유히 헤엄치는 걸 보고서야 물이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비가 물에 부딪혀 촤촤 하는 파열음을 즐기다 습지에서 발걸음을 떴다.

물영아리오름은 분화구보다 둘레길이 더 멋졌다. 곶자왈이 떠오르는 숲길, 침엽수가 쭉쭉 뻗은 숲길, 초원이 펼쳐진 오솔길이 번갈아 나왔는데, 각자 매력이 상당했다. 특히 초원엔 족히 50마리는 되어 보이는 소가 넓게 퍼져 풀을 뜯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 말이다. 음머- 하고 소리치니 몇몇 소가 음머- 하고 대답해줬다. 내게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감동이었다.

음머, 했더니 음머, 해줬다. 아마 오른쪽에서 5번째 있는 소였을 것이다.

빗길에 바지와 양말이 다 젖었다.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가, 가랑비처럼 잠잠해졌다가를 반복한다.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땀인지 비인지 모를 습기에 찝찝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비가 채워주는 이 길을 걷는 게 좋았다.


나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옷이 젖어 찝찝하다. 몸이 무거워지고, 눅눅한 습기에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우산을 들면 손 하나를 사용하지 못한다. 따스한 햇볕을 느끼거나 아름다운 채도의 노을도 볼 수 없다. 비를 맞고 수분을 제대로 말려주지 않으면 곳곳에서 불쾌한 냄새도 난다.

그렇다고 비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세상을 씻어주는 느낌이다. 잎에 떨어지고 흙에 떨어지며 물에 떨어져서 다양한 하모니로 귀를 즐겁게 한다. 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련하고 진중한 분위기도 썩 마음에 든다. 잔잔한 물에 그리는 동심원 파동은 아름다운 물리 법칙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서 비를 걷는 이 순간, 행복했음에도 마냥 행복한 것이 아니다. 최악의 불행이 0점, 최고의 행운이 10점이고 가운데가 5점이라면, 지금은 5.4점 정도다. 소소하고 은은한, 그래서 편안한 행복이다. 기분은 좋은데, '이게 행복한 게 맞나?'하고 불쑥불쑥 생각한다.

비 오는 날, 걷는 게 좋긴 한데...


나는 크게 무엇을 좋아하거나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노래를 물어보면 고민에 빠져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5점 만점인 영화 평점에 5점이나 1점은 주지 않는다.
모든 사건이나 현상은 장점이 있다면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착한 사람도 나쁜 면이 있고, 나쁜 사람도 착한 면이 있다.
세상 대부분은 중간에서 '조금' 치우칠 뿐이다.
어떨 땐 좋을 수도, 어떨 땐 싫을 수도 있다.


대학 후배를 대상으로 진로 관련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식상하디식상한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덧붙여 말했다.

'이게 내 길이다'하는 확신이 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조금이라도, 단 0.1이라도 좋아하는 일부터 해보세요.


중고등학교와 대학 초반까지, 나는 '천직'이 있을 줄 알았다. 첫눈에 반하듯, 어떤 일에 단숨에 끌려서 쭈욱 빨려들 수 있는 그런 일. 만화나 판타지 소설처럼 나도 몰랐던 숨겨진 능력이 뿅! 갑자기 그 분야 일인자가 되는 그런 상상. (나만 그런 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전공 책도 찾아보고, 진로상담과 심리검사도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내게 그런 '운명적인 만남'은 없었다. 난, 소설 속 주인공은 아닌가 보다.


진로를 고민하다 여러 교수님과 면담했던 게 기억난다. "교수님은 교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게 언제이신가요?" 놀랍게도 대학생 때 진로를 결정한 교수님은 한 명도 없었다. 과학 교수님이든 사회과학 교수님이든 인문학 교수님이든, 우리 학교 교수님이든 서울대 교수님이든 미국 대학 교수님이든,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셨다. "순간순간 조금 더 끌리는 선택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소수점 행복

나는 '소수점 행복'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매운 것 빼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데, 오늘은 카레보다 조금 더 끌리는 소고기뭇국을 해 먹었다. 저번에 갔던 비 오는 바다도 좋지만, 오늘은 비 오는 숲을 조금 더 가보고 싶어서 오름을 걸었다. 제주로 이사한다는 건, 처음엔 그저 무게감 없이 재밌는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힘들고 귀찮았지만, 완성된 글을 보는 뿌듯함을 조금 더 좋아했더니 어느새 책까지 쓰게 됐다. 방학 때 아무것도 안 하는 일상보다 조금 더 재밌는 코딩을 취미로 시작했는데, 지금 직업이 개발자네?


한 때는 '아주 좋아하는 것' 또는 '아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표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거기에 맞춰줄 수 있었고, 맞춰주고 싶었다. 내 '소수점'보다 상대의 '정수'가 더 클 것 같아서.

그러다 나의 '소수점'에 주의를 기울인 순간, 비로소 나의 우주가 펼쳐졌다. (우주배경복사의 미세한 불균일성으로 이 세상, 이 지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나비효과에서 작은 움직임이 태풍이 된다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5에 머무르지 않고, 5.1로, 고작 0.1 움직였을 뿐인데!

우주배경복사(우주의 온도 같은 것). 빨간 부분이 0.00001도 정도 온도가 높고, 파란 부분은 0.00001도 정도 온도가 낮다.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다(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불행도 엄청난 게 아니다(아닌 것 같다).

간혹 큰 행운이나 불운이 나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소수점이다.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쌓여 인생을 이끄는 게 아닐까?



오늘은 간만에 달달한 초콜릿 하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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