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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Oct 10. 2021

여기가 제주인 걸 가장 실감하는 순간

내가 육지와 많이 멀어져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아들, 거기 비 많이 와?


얼마 전, 드디어 제주의 태풍다운 태풍을 처음 만났다. 그의 이름은 찬투.

제주에서의 첫 태풍만큼, 이례적인 태풍 진로라 한다. 제주의 태풍은 워낙 뉴스에 많이 나와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여서,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큰맘 먹고 산 9만 원짜리 태풍 우산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태풍 찬투의 진로. 제주도를 스쳐 지나갔다.


일주일 동안 해를 보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노을은 두꺼운 구름 뒤에 숨어서 참 비싸게 굴었다. 본격적으로 태풍이 지나기 전에도 비는 찔끔찔끔 와서 운동하기도 힘들었다.

덕분에 좋았던 건, 덥지 않았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됐었다는 점! 심지어 밤엔 추웠다. 문 열고 여름 이불로 자다가 밤에 추워서 혼났다. 다음 날에 바로 가을 이불을 꺼냈다. 아침 느낌이 퍽 가을 같았다. 서늘한 시원함이 가을만의 향기 같았다.

우중충하게 무거운 구름도 썩 나쁘진 않았다. 무거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바다의 분위기도 좋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열심히 부서지는 풍경을, 여행처럼 시간 아까워하지 않고 볼 수 있다. 바람이 거칠어질수록, 회사 동료의 '태풍 조심하세요~'하는 말이 실감 났다.


나는 사실 4층 입주민이기 때문에 태풍 피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건물도 오래되지 않아 물이 새는 것도, 바람에 날아갈 걱정도 없다. 굳이 걱정하자면, 경차가 바람에 흔들리거나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의 위험성 정도? 그보다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세탁기를 돌려놓는 게 더 와닿는 문제다. 비가 많이 와 신발이 젖을 테니 당분간 아쿠아슈즈를 신고 출근해야지.


비 오는 어느 날

다행인지는 몰라도, 태풍이 올 때 야근이 잦았다. 집에 콕 박혀서 할 것도 없었는데, 할 일이 넘쳐난다. 태풍을 회사에서 안전히 넘긴다.


태풍 우산은 정말 든든했다. 블런트우산이라고, 우산계의 명품인데, 바람이 심해서 우산이 휘어도 끄떡없었다. 충격 분산이 완벽해서 우산살 손상이 없었고, 특히 우산천은 방수가 거의 완벽했다. 오랜 시간 쓰고 있어도 우산이 스며들어 젖은 적이 없었다. 실내에 들어오기 전 툭툭 2번만 쳐주니 물기가 거의 없이 말끔해졌는데, 우산 비닐이 따로 필요 없었다. 너무 광고 같으니 광고 아님 거의 유일한 단점을 말해보면, 우산을 접으면 고정이 잘 안 되고 금방 우산이 펼쳐진다. 우산을 지팡이처럼 쓰려면 우산을 접고 찍찍이로 잘 말아놔야 한다.


비 오는 날, 물영아리 오름 주변


비 오는 감성 풍만한 사진 하나 인스타그램에 올려볼까, 하고 인스타를 딱 켜니, 놀라운 사진이 눈에 보였다. 파란 하늘과 점점이 박힌 흰 구름, 그리고 "날씨 좋다"하는 텍스트. 인천에 있는 친구가 올린 사진이었다. 날씨 정말 머선129.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보니,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드는 어두운 녹색 나무와 쥐색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보였다. 내가 같은 나라에 있는 게 맞겠지?

날씨 앱을 켜서 전국 날씨를 확인한다. 수도권은 맑음, 제주는 비. 육지에선 부산이 유일하게 비가 온다고 한다. 부산에 있는 친구는 내가 보는 풍경을 공유하겠지? 텔레파시가 통할 것 같다. 꾸리꾸리한 날씨를 나만 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만으로 친밀감이 상승한다.


날씨는 장소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특징 같다.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구절에서, 많이들 '같은 달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같은 달을 공유하는 것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 외국에 오갈 때도 날씨로 '내가 다른 나라에 왔다!'를 가장 먼저 느끼는데, 난 캘리포니아에서 귀국했을 때 그 습한 한국의 여름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불쾌함과 편안함의 오묘한 조화란.


육지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본다. '거기 날씨 좋냐?' 부쩍 제주가 서울에서 멀어 보이는 느낌이다.

내가 제주에 있는 게 맞구나! 그렇게 오늘도 제주에 조금 더 익숙해진다.




* 2021년 9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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