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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Aug 11. 2021

신비로워서 무서웠던 곶자왈, 실존적 사색에 빠져버렸다

제주에서 두 번째 오름,큰지그리오름걸은 썰

주말을 맞아 청소할 때, 귀가 심심하지 않게 틀어놨던 올림픽 야구가 끝났다.

하루가 늦은 오후로 달려갈 무렵, 이렇게 제주 토요일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지도를 열어 저장해뒀던 여행지 목록을 살펴봤다. 가볍게 걷고 싶지만, 내리쬐는 해는 피하고 싶었고, 멀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책 <<제주에서 1년 살아보기>>에서 극찬했던 큰지그리오름으로 정했다. 지도에 적혀있던 후기에도 걷기 좋은 길이라고 하더라.



20분 정도 운전해, 오름길의 시작점인 교래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제주도민 입장료 면제에 내심 기분이 좋다. 이러려고 제주 왔지!

오름길로 들어서자마자 숲길이 이어졌다. 편도 4Km, 왕복 2시간 30분이라 오후 7시 남짓 되어야 돌아올 시간,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려 부지런히 걸었다.


내가 지금껏 걸어왔던 산길과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나무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고,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지였으며, 나무마다 덩굴이 얽혀있어 작은 정글 같은 느낌이었다. 내 시야가 닿는 가장 먼 곳까지 일관적인 생태였다. 어디선가 이 숲을 지키는 신비로운 영물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분위기였다. 여기가 바로, 이름으로만 들었던 곶자왈이다.

신비롭게 쓰러진 나무, 쓰러져서도 곶자왈을 멋스럽게 꾸며주고 있다


첫 1km는 걷기 편한 평지였고, 그 이후로 1km 정도는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다. 곶자왈은 얼키설키 하늘을 가리고 있었는데, 미처 덮지 못한 틈새로 햇빛이 새어들었다. 걷다 보니 바닐라향 같은 어떤 포근한 냄새가 느껴지는 곳이 두세 군데 있었는데, 새까지 오묘하게 지저귀고 있어서 ‘여기는 어떤 역사적인 현장이 아니었을까?’ 하고 혼자만의 소설을 상상했다.


큰지그리오름 전망대까지 500m 정도 남았을 때, 세상 전체를 덮고 있을 것 같던 곶자왈이 갑작스레 끝났다. 서서히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뚝! 하고 끊겨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곶자왈 영역 이후는 잔풀 없이 깔끔하고 드높은 삼나무 숲이었다. 누가 일부로 선을 그어놓은 듯 곶자왈과 삼나무숲이 나뉘어 있었는데,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곶자왈의 신과 삼나무숲의 신이 합의한 휴전선일까?

갑자기? 곶자왈에서 삼나무숲으로 변화


삼나무 숲은 곧 끝나고, 육지에서 종종 봤던 것 같은 산길이 나왔다. 마지막 오르막을 오를 땐, 평지에서 걷던 발걸음으로는 숨이 가빠 두어 번 쉬었다. 정상 30m 전까지도 ‘이런 곳에 전망대가 있다고?’ 의심할 정도였는데, 나무로 쌓인 동굴의 끝이 보이고, 갑자기 분위기 전망대. 와… 이걸 보려고 내가 1시간을 땀 흘리며 걸어 여길 왔구나. 단번에 수긍했다.

풍경사진, 일반적인 인물사진, 점프사진을 찍고 ‘이제 내려갈까?’ 했지만, 2시간 반 산행의 하이라이트를 고작 5분 만에 마칠 순 없어서 데크에 누워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겼다. 마침 해가 숨바꼭질하며 구름 뒤 숨고, 바람도 선선히 불어서 땀을 말려주기도 좋았다.

노을은 바닷가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나무숲 동굴로 들어가 부지런히 걸었다.

큰지그리오름의 정상 전망대. 시야가 넓게 트여 너무 행복했다.


아무도 없었다.

오름길을 걷기 시작했을 땐 30분 만에 5~6팀 정도 마주쳤다. 그 이후로 정말 단 한 명도, 2시간 내내 만날 수 없었다. 덕분에 마스크를 벗고 거친 숨을 편히 내쉴 수는 있었지만, 곶자왈의 세상 속에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조금 외로우면서 무서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를 피해 풀숲으로 들어가는 뱀을 만난 이후 나는 실존적인 사색에 빠졌다. ‘여기서 갑자기 뱀에 물리면 어떡하지?’ 하는 가정이, 여기저기 철학적 질문까지 닿았다. 해가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어두워진 곶자왈의 신비로운 풍경도 사색에 한몫했다. 이젠 사람을 만나는 게 더 무서울 거로 생각했다. 여기서 사고가 나면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기 딱 좋은 곳이다. 상상 속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삶에서 의미를 부여할만한 것을 열심히 떠올려 봤다.


생각하고 사유하면 할수록, 인생은 원래 의미가 없고 죽으면 남는 게 없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난 어느 짧은 순간만 느낄 수 있도록 태어난 필멸자다. 그 순간 속에서 나는 여길 걷고 있다. 내가 서른 즈음 되는 나이에 제주로 이사 와서 문득 찾아온 곶자왈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본다. 참 오묘하다, 내가 이 순간에 이렇게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나는 어떻게든 내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구나.

동시에 삶의 한계를 잊게 해주는 존재를 떠올렸다. 누군가 함께 왔다면 또 재밌었을 것 같고, 든든했을 것 같다. 의미 없는 삶이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에 따라 의미를 부여해보자면, ‘관계’는 분명 인생의 VIP석을 차지할 것이다.

2시간 반은 사색하며 걷기 참 좋은 시간이면서, 누구와 함께 걷기도 참 좋은 시간 같다.

나를 사색하게 한 뱀. 이렇게 예쁘고 귀엽진 않았다.


아, 바다에서 노을을 보겠다는 계획은 포기했다. 태양이 바다의 지평선으로 넘어가기 전에, 산등성이 두꺼운 구름 뒤로 먼저 얼굴을 숨겨버렸다. 해가 남긴 발자취에 구름 한쪽이 파스텔 분홍으로 물들었다. 아쉬운 대로 눈으로 열심히 구름 사진을 찍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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