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많은 이들이 유리 구두를 신기를 바란다. 신데렐라는 자수성가의 상징이 아닌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으로 인생이 바뀐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신데렐라를 사랑한다.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소망을 품게 해주는건 백설공주도 개구리 왕자도 아닌 신레렐라이기 때문이다.
유리구두는 본래 신데렐라에게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벗겨져 주인을 잃은 한짝이 되기 위해 존재했던 것 처럼 아쉬워하는 왕자의 손에 발견된다. 발에 꼭 맞는 구두였다면 애초에 그렇게 될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녀는 애초부터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그랬던 것일까?
신데렐라는 우연에 의한 역전의 상징과도 같았다. 마치 우리가 복권을 긁고, 빚을 내서라도 리스크가 큰 주식에 투자하듯이 신데렐라의 구두는 요사스러운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데렐라의 신화를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신데렐라는 매섭게 현실의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척 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깨어질 구두를 선사한다.
동화는 우리의 마음을 찔렀다. 정확히 짚은 부분은 아팠다.
"너희도 이렇게 될 수 있을거야."
라는 환상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심어두면 그것은 씨앗 처럼 심겨 오랜 시간에 걸쳐 나무로 자라난다. 그것이 열매를 맺을 때는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어느정도 성장을 했을 때라야 그 허구의 신화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삿된 희망으로 피어난다.
구두는 언젠가 벗겨진다. 시간이 지나면 환상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극이 완전히 반전되는 시기는 신데렐라가 마녀의 손에 변신할 때가 아니라 이 유리구두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마법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동화의 마지막은 모두가 알고 있듯 행복한 마무리로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 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종결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렇게 계속 살아가고 있답니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왕자, 자신의 유리구두를 기다린다.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환상을 품고서 현실이 한순간에 바뀌길 기도한다. 이 졸부신드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숨쉬고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의 유리구두를 광이 나도록 닦는 것은 정직함과는 거리가 먼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으로 변질된다. 처지가 바뀌고 행복해지는 것은 그만한 부와 권력 그리고 능력있는 배우자를 얻어 결점이 사라져 완벽해졌다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기다리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욕망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신데렐라와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결점이 사라진 미래를 꿈꾸게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대담함과 정직함이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이면에 있는 이 동화는 노력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과거에는 넘을 수 없는 계급의 벽이 있었듯 오늘 날에도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기를 바라는 마음. 사실은 나도 그런 사람들과 같아질 수 있을거란 소망을 품게하는 것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다.
신데렐라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기다리게 되는 존재다. 그녀는 공주도 아니며 재혼한 아버지의 계모와 딸들에게 고통을 당한다. 직장 상사와 수많은 소비자 그리고 갑이 되어버리는 존재들에게 자신을 소비당하는 존재들에게 신데렐라의 기다림이 존재한다.
졸부가 되고자하는 믿음은 그녀가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포장으로 가리워진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길 바라며 그리 여기는 마음은 신데렐라의 순결한 도덕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녀의 근면 성실함이 그녀를 구원한 것 같이 보이는 동화는 사실 인과관계가 없는 부지런한 소녀의 성공담으로 포장된다.
아마 당신이 신데렐라를 바라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신데렐라는 바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마음도 그런 기제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특히 스스로 고생하고 근면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혹은 스스로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신데렐라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을 위한 유리구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화가 주는 허구의 비참함이다.
혹자는 복권 등의 존재를 예로들며 그들의 성공신화를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신데렐라의 구두와 같은 상술이라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어른들의 동화에 뛰어들며 복권을 사지만 그것은 장사치의 배를 불려주는 역할만하게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장사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유리구두를 바라고 있을까? 어떤 마음으로 당신의 왕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왕자도 구두도 아닌 마녀다. 당신을 변화시켜줄 흉흉한 존재. 당신에게도 기회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게 만드는 그 존재는 바로 동화속 마녀이다. 기회를 쥐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사실은 그런 자신에게도 찾아올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동화는 기회주의적인 환상을 사람들에게 품게한다. 교훈이 아닌 쾌락이 주가된 이야기는 환상을 품어 쓴 현실을 견디게하는 마약이 된다.
어쩌면 가르침 없는, 통찰 없는 쾌락을 찾는 마음은 구두와 함께 깨어져야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