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사님의 말
"광규야 어떡하냐. 평생 너의 일이 없을 텐데..."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한 선배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었다.
후배의 앞날에 대해 진심으로 탄식하며 무언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이런 저라도 써주시는 게 감사하죠."
목사님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마침 듣고 싶었던 말. 그러나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하는데 목사가 되면 그러기가 힘든가 보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씁쓸한 표정으로 목사님은 자리를 떠나셨다.
신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청년들에겐 뜨거운 마음이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바로 세우고 개혁의 전통을 계승하여 세상이 조롱과 멸시를 받을 만큼 타락해있는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런 야성을 가진 심장으로 신학함의 길에 뛰어드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마음은 점점 사그라든다. 주로 끊이지 않는 구조적 부조리와 폭력 속에서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순응하거나, 너무 큰 실망으로 인해 개혁에 대한 뜻을 잊어버리는 마음이 그렇다. 의로운 마음은 구조적인 부조리함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것일까. 젊은 날의 패기와 야성은 시간이 갈수록 꺼져가는 화톳불처럼 사그라들고 뜨거웠던 연기만이 남아 하늘로 높이 올라갈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셨고 이젠 쉽게 볼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으나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 기억하고 있다.
평생 너의 일이 없을 텐데. 이것은 평생 주의 일을 하겠다는 사역자의 소명과 같은 말이었다. 즉 소명을 따라 살면 자신의 일이 없고 자신의 바람이나 욕망을 돌볼 기회가 없어야 함을 의미했다.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참아야 함을 의미했다.
또한 자신의 일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 사랑을 쫓아 살아야 함을 의미했다. 남을 위해 살고 타자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에 자기의 일은 없을 것이란 걸 암시했다. 내게 그런 것을 바라셨나 보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셨든 간에 그날 나에게 말씀하실 때는 젊은 신학도 후배에 대한 일종의 기대가 어려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이 빠진 무력감과 부조리에 무던해지는 마음이 아닌 졸업을 하도록 개혁의 열정을 가지고 있던 내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어느새 나의 일을 찾고 나의 유익을 구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잃을 것과 지킬 것이 생긴다면 나 역시 이기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두려워하며 이 길을 걸어왔지만, 나이를 먹으며 생기게 되는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여전히 청렴한 삶으로 주변의 귀감이 되며 섬김으로 모범이 되는 선배와 동료 사역자들이 많이 있다.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매우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나 역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야성을 잃지 않기를, 앞서가신 선배들에게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역자와 뒤를 따라올 후배님들께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부끄러움이 많은 삶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입바른 말은 너무나 쉽게 나오지만 바른 삶은 힘겹게 짜내야만 한순간 베어 나오는 것이란 걸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나는 야성이 아니라 교만함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와 간절한 한 가지는 내가 쉽게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초심은 죽는다. 초심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그 초심을 있게 했던 결심만이 남아 하루하루가 새로워진다. 새로운 하루를 살아야만 우리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늘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