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야기
세습, 성범죄, 비리, 반목, 당파싸움. 따돌림과 차별. 사람 모이는 곳이면 으레 그렇듯 조용해질 만하면 터지는 사건과 사고들. 어쩔 수 없다. 단지 머리 아프고 피곤하기 싫어서 다른 거 아니냐 하며 피해온 교회 공동체의 곪은 상처들.
교회에 멀쩡히 계셨던 예수님. 아니 저기 맨 끝자리에서 겨우 자리만 부지하고 계셨을 예수님을
고작 자신의 욕망 하나 들여보내려고 쫓아내 버렸던 거죠.
참. 외로우셨을 거예요. 신학생들 어떤 각오로 오는지 압니까?
보통 1학년 1학기 때가 제일 뜨거워요. 복음 하나에 죽고 사네 어쩌네 열심히 많아요.
맞아요. 그동안 언론과 젊은이들이 줄기차게 비판하던 그 기성 교회 선배님들.
그리고 저까지 포함한 사역 한답시고 앞에 나오는 사람들 전부
그런 고백 해놓고, 예수님 쫓아냅니다.
예수님 참 외로우셨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져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도들과 많은 제자들로 인해 초대 교회가 일어나고 선교를 하던 그 시절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향한 국가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베드로에게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라고 설득하고, 마침내 베드로는 그 도시 로마를 등지고 도망치게 됩니다. 로마 도시의 성문을 막 벗어난 베드로는 저 멀리 아피아 가도에서부터 예수님께서 로마를 향해 걸어오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 던진 베드로의 질문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어 훗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어, 나는 저 로마에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간다.”
정신이 번쩍 든 베드로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전해져 내려오죠.
우리는 세상을 싸워 이겨야 할 적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셨다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상.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단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심판의 도마 위에 오른 그 세상과 대조적으로 우리 교회는 바로 택함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헛소리 앞에서 양심에 가책은 들지 않으십니까? 어떤 질문이나 모순은 찾지 못하셨습니까?
그따위 것을 복음이라 주장하면서 진짜 하나님께 죄송했던 적 없으셨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려 시도조차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이중엔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분 있으십니까? 그렇게 듣고 자라오신 분 계십니까?
전 그런 줄 알고 살았어요.
혹시 지금부터 드릴 제 말이 불편하시다면, 끝나고 찾아와 저와 대화를 나누셔도 좋고, 멱살 잡고 혼내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 안에 주님께서 계신다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 네 권의 복음서를 죽 읽어보면 성전에 몇 번이나 들어가셨을 것 같습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대개 3년이라 추정하는 공생애 중에 예수님께서 정작 성전에 출입하셨다는 말은 성경에 그리 자주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배라는 게 뭘까요? 예배자는 뭘까요?
이 고민을 할 때면 저의 어머니께서 예배를 위해 기도를 드리실 때 반드시 넣으시던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복을 내려주옵소서.”
금요 기도회 찬양팀을 준비하던 저에게 떠오른 묵상이 하나 있었어요.
‘예배는 오늘 이 자리.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한 이들에게 그러니까 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예수님께서 소망이 되어주시길 바라고 또 구하는 것이라고.’
졸업을 앞두고 한참 동안 깊은 회의감에 빠져있던 저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발상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이 자리에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을 때에,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다고 말하고 있을 때에
그 휘장이 드리워진 지성소를 바라보며 하나님 여기 계시다고 믿고 있을 때에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모여 있을 때에
정작 하나님이 더욱 필요한 자리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이 지은 성막, 성전에는 하나님을 만나던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던 그 순간에 하나님은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당시 종교인이 가진 그들의 교만을 정면으로 부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이 성전. 이 지성소에서만 우리를 만나주신다고.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오만한 생각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우리는 세상과 다르다는 그 종교인의 위선과 오만함을 찢으신 거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을 때에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 같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아픔과 고통이 있는데 너네가 믿는 하나님 대체 어디 계시냐고. 예수를 믿는 너희 같은 놈들이 악행을 저지르는데 과연 너네가 믿는 하나님 계신 게 맞냐고. 하나님이 계시다 말하는 네가 지금 이럴 수 있냐고.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할 질문이 이 우리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안타까운 현실에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우리가 증거 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기를 바라는 악인들의 형통한 세상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세상과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해왔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처럼 선포하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하나님을 가장 느끼기 어려웠던 것은 나의 죄악 된 마음과 교만한 행동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군가 당신을 보고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시며, 오직 좁은 지성소에서 자격 있는 제사장들만 만나주시며, 성전에 찾아와 속죄의 제를 드린다는 게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그 직전까지의 예수님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 하나님은 육신들 속에, 고통 가운데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불려지던 문둥병자와 눈먼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가장 더러운 직업을 가진 죄인들의 대표 세리와 창녀들을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친구와 그 유가족들 앞에서 함께 슬퍼하셨고, 죽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하며 기도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말씀드린 그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그 높이 들린 보좌와 지성소에 앉으셔서 세상을 무책임하게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시냐고요?
이 땅바닥이요. 우리가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당신의 눈물이 떨어져 말라가던, 구걸하는 거지가 드러눞고, 가난한 자 내몰려 주저앉는, 애통하는 자가 힘껏 땅을 치며 울고 있는 그 바닥에 하나님은 언제나 계셨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세상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바로 저기에 계시거든요.
예배가 뭘까요? 대체 여기 뭐하러 오셨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뭡니까? 복음서의 하나님이 영광이라 말했던 예수는 어딨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저들과 너무 멀리 있지 말아 달라고, 제가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저들이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은 너무나 무겁고 버겁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사람들은 다들 말합니다. 세상은 원래 혼자 사는 거라고.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하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세상 사람 다 떠나가도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대적하던 그 세상엔 여전히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세상은 결국 외로움 투성이라서, 교회가 그들을 환대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니면 당신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외로운 곧이라 고백하시렵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전 교회와 성전 된 당신 안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그 종교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성전문 밖의 세상을 제발 한번 더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성전에서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눈이 향해야 할 곳은 성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만 바라봤기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도리어 그를 보고도 부정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성전과 지성소가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찢으신 휘장을 다시 한번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자신을 성전이라 말하는 그 믿음의 휘장 주님께서 찢으실 겁니다.
하나님을 너무 멀리 계신 분으로만 본다면, 정작 십자가를 지신채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배신하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쓰레깁니다. 저 같은 건 목회할 자격이 없어요. 사실 도망치려고 했어요. 부르심이고 뭐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도 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도 스스로 나는 주님께 쓰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고백하며 후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대학교를 마지막 학기를 마치기 전에 한참 마음이 어려울 때에 기도 탑에서 울다가 나와서 선배를 붙잡고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하소연했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하고. 얼마 전에 목사 안수를 받으신 그 선배님께선 제게 이렇게 호통 치셨습니다.
“너 그냥 자격 없이 목사 해. 평생.”
지금 한국 교회가 망하는 건 자격 있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서 그래. 내가 목사요. 내가 장로요. 내가 전도사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믿지 않는 백성들 구원하실 때에 이스라엘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망했다고.
그래요. 내가 목사요. 내가 전도사요. 내가 장로며 집사요. 내가 교사요. 리더요.
스스로에게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자기가 가는 곳에 하나님도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면, 광신은 자신의 신앙 방법론을 믿습니다. 내 방식, 내 말이 옳은 줄 알죠. 하나님이 자기 편인 줄 알아요. 하지만 성도는 자신을 믿지 않아요.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려고 해요.
도망치고 싶어 하는 저에게 그 선배는 지금 이거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서 살면 나을 것 같냐고. 나는 네가 남아서 고생했으면 좋겠다고, 바울 그 양반도 평생 자격 없이 일하다 죽기 직전에서야 인정받았다고, 마침 바울 방에서 기도하고 나온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 전부 실리를 따라서 살 때, 내가 먼저 섬기겠다고 내가 대신 죽겠다고 말하는 그런 놈들은 폐인이죠. 미친 사람들이죠. 여러분 먼저 사랑하는 건 호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믿습니까? 하나님 만나셨냐고요. 찬양 드릴 때 사랑한다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인이 호구인데! 어떻게 종이 호구가 아닙니까?
도마. 믿음 없는 도마. 죄송하지만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이보다 더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양반은 죽었어요. 선교하러 가서 죽었다고요. 우리 중에 누가 그보다 더한 믿음이 있습니까?
누가 믿음이 없습니까? 적당히 현실의 불의에 타협하고, 적당히 이웃의 아픔에 침묵하고, 그렇게 간신히 살아가는 게 고작인 바로 제가. 설교한답시고 여러분 앞에 서있는 못난 제가 믿음 없는 도마보다 못나게 겨우 살아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선택적인 아가페. 반쪽도 되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자격 없는 그리스도인 되십시오. 평생 자격 없이 교회에 나와서, 평생 자격 없이 예배드리십시오.
그렇게 평생 자격 없이 찬양드리시다가 그러다 죽으세요.
많은 이들이 성경에 있는 것을 그대로 믿으라고 말해요. 여러분 그게 됩니까? 그대로 지켜져요? 의심하고 흔들리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믿음은 말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게 아니에요. 믿음은 당신이 흠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쓰여있으니 그대로 믿고 나아가라는 말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겐 어떤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그들에게 질책과 상처가 될 수 있어요. 여러분 의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실 포기할 이유가 더 많을 수 있어요. 사실 내가 못할 이유가 더 많고, 나의 부족함과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가 더 많을 겁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건 그렇게 넘어져도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평생을 한 번이라도 더 먼저 섬기고, 한 번이라도 더 먼저 사랑하려고, 끊임없이 매일매일 싸우는 그게 바로 기독교의 신앙생활 곧 거룩한 일상 만들기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당신의 능력에 부딪혀 깨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의심하고 흔들리십시오. 그래도 괜찮아요. 그 질문보다 작은 하나님 아니십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때에서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믿음 조자 자격 없이 이어 갑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쳤던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
그가 다시 한번 소명의 자리에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에,
주님은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살다가 한 번쯤 도망가고 싶을 때, 포기하려고 할 때, 내 믿음이 작고, 내가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물어보십시오.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여러분 안에 성전을 세운다 할 때에 물어보세요.
“주님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성전이라 말할 때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그 주님 지금 그 성전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 지금 저 교회 문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