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침묵하다

나의 믿음

by 광규김

예수를 의심한 도마를 믿음 없는 도마라 부른다. 그는 예수의 상처를 보기 전까지 그를 믿지 못했고 끝까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선교를 떠나 죽었다. 즉 순교했다는 말이다.


적어도 적당히 현실의 불의에 침묵하고, 정의를 행하길 기피한 기존 종교인들보다는 더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합리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수도 있는 것이다.


덮어놓고 믿습니다 아멘을 열창하는 이들보다는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타협한다는 말은 정의에 침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명과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그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말과 같다. 즉 그것은 야성의 죽음이다.


그것은 부끄러움 많은 나의 삶과 같다. 신학도로서의 양심과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버리고서 현실의 불의 앞에 침묵하고 공의의 부름 앞에서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망쳐왔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둘러보면 사랑이 필요한 곳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나를 노리는 원수 또한 도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을 따라 서로를 미워하며 혐오한다면 사랑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사랑을 나의 삶의 지표라 그토록 말해왔지만 나는 그것을 그 말대로 지키지 못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여전히 외로움에 타들어가며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잘됨을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여호와가 향기로운 예물에 질려버렸고 오히려 그것을 정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손이 부정했기 때문에 그 손에 무고한 피가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하노라"


기독교는 제사의 종교가 아니었다.


얼마전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예배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그것을 교회에 대한 핍박이라 말하며, 예배를 사수해야한다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지탄과 조롱을 받았고, 무지한 행위는 결국 자신의 공동체에게 그대로 돌아오게된다.


기독교는 국가와 사회의 공의를 논하는 종교이다. 복음은 다스림의 원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의 재판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의 종교가 되어버린 제도종교의 타락은 정의에 철저히 침묵함과 동시에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파렴치한 집단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세속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민중은 점점 더 성숙해지기에 이른다. 이성이 예찬 받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태가 깊어짐에 따라 종교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러나 종교의 철학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믿길 원하는 것이며, 종교는 자신 스스로가 말하던 그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요구에 그대로 응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매우 고차원적인 윤리의 실천을 요구했고 끊임 없이 사랑에 대한 묵상과 실천을 명해왔다.


사랑. 사랑만이 우리의 정의라 할 수 있었다.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과 율법을 함축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 말했다. 사랑이야 말로 기독교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말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이라 말하며 그분이 알파요 오메라가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사랑에 침묵하는 것은 정의에 침묵하는 것과 같다.


나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종교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이기적 탐심을 채우려는 악독한 시도를 지탄할 뿐이다.


종교란 원어적으로 최고의 가르침을 말한다. 자신의 삶에 있어 지고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을 가장 가치있는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가?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다 말한다면 사랑과 정의야 말로 그 중심에 있어야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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