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우리를 찾으신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 같고,
한 편의 영화와 같을 것이라고.
그곳엔 무언가 감동적인 계기와 원동력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그저 몇 가지 수식어로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싶어 할 뿐입니다.
기독교라면 흔히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그 말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유명을 얻은 이들을 마치 우상화하듯 대합니다. 그러한 풍조 속에 그들의 삶을 조명하신 하나님이 아닌, 정작 조명을 받아 빛나는 단편적 이야기들을 보며 신앙을 뜨겁게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신앙의 롤 모델엔 언제나 요셉과 다니엘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찾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이 기대하는 당신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요즘 들어 특히 더 모든 이들의 삶을 존귀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존귀한 삶이란 말에 “남들보다 더욱”이란 수식어를 덧붙이고 싶어 합니다. 강박처럼 지배당하는 그 생각은 우리의 신앙에 그대로 나타나곤 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다니엘도 요셉도 아닙니다. 모두의 삶은 그 자체로 존귀하겠지만, 존귀한 삶과 주목받는 삶은 확연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공간적 배경은 중동의 한 작은 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는 그렇게 화려한 수식어와 커다란 꾸밈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자를 부르실 때, 두 벌 옷과 배낭과 지팡이조차 필요하지 않다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과 놀라운 표적이란 화려한 수식어가 없더라도 충분히 사랑을, 복음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모두가 놀랄 만한 말씀을 전하심에 따라 많은 이들이 예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가 가득한 그 자리에 그리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조명 밖의 인생들을 향해 계셨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열기에, 놀라운 표적에 도취된 듯 주를 따르는 이들이 있으나 홀로 독배를 마셔야 했던 예수님과 그들이 심취한 영적 세계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종교에 도취된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신이 언제나 자신의 편이란 착각을 합니다. 스스로 가진 사유에 의문을 갖지 않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 여기기 시작하죠.
말씀이 개인의 기복과 번영에 대한 촉구와 축복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들이 세운 금송아지 우상은 21세기에 또다시 임한 바알이 되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보며 자신들을 구원한 여호와라 여겼듯 나를 빛나게 해 줄 그것을 메시아라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호한 말로 군중을 유혹하는 자칭 영적 지도자들의 말은 전혀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우상이 아니셨고, 복음은 보편적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철학은 거룩했고, 사랑이라는 그의 다스림의 논리는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 황제의 복음보다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적과 표적에 열광하던 무리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을 걸었던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꿈을 이뤄줄 메시아에 도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시작되고서 자신의 메시아와 함께 개선하길 원했던 군중들은 떠나갔습니다. 백성이 뱉는 침과 조롱을 맞으며 그리스도는 걸어갔습니다. 종려나무 가지와 겉옷이 깔려 있던 거리를 지나쳐 가셨듯 예수님은 모욕이 가득했던 거리를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은 군중의 환호가 가득했던 성문 어귀에 멈춰 서서 자신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곳은 복음을 위해서 그저 지나쳐 가야 할 길목일 뿐이란 것을요.
그곳엔 더 이상 사람들이 열광하던 이적을 행하던 메시아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으나 그것이 그들의 믿음을 지켜주진 못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기적이 당신의 믿음에 절대적인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성경은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두 눈으로 목도한 백성들 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을 배신하고 떠나갔다는 것을요.
기적을 근거로 삼는 믿음에 복음이 들어설 자리가 있겠습니까? 처음과 끝이 미약한 이들과 아무것도 아닌 듯 살아온 이들에겐 전해질 사랑의 이야기도 없었을까요? 조명 밖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을까요?
그런 식으로 예수를 받아들인다면, 그저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삿된 소망을 품고서 복권 긁는 심정으로 매일 같이 기도드리는 사람만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적이 보이면 신을 믿겠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복음에 대해 완전히 잘못 전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 무엇이 우리의 증거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하면서 사랑이 아닌 이적만을 근거로 전하려 해선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기적은 짧은 시간에 좁은 장소에서 적은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하려 하는 사랑은 세상 전부를 품으려 하고 세상 전부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기적보다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믿으면 잘되고 잘된다는 말은 허망한 바벨탑이며 결코 구원받은 백성의 징표가 되진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숫한 기적 조차도 가롯 유다의 배신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 된 특권은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넓게 퍼져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무엇보다 보편적이었습니다.
사랑은 영화도 드라마 보다도 더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매 순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결코 극적인 일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질 생명을 우리 게 주셨지만, 셀 수 없는 기회 역시 저희 손에 주셨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을 힘써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건 기적 같이 짧고 특별한 순간이 아닙니다. 그대가 살아온 자리보다 더욱 넓게 퍼져나갈 진정한 기적이었습니다.
예수가 머무셨던 33년의 이야기처럼.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이 이어지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을 겁니다. 전능한 표적은 나를 바꿀 수 없으며 당신의 믿음을 보증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린 배신할 것이고, 의심할 것이고, 이용하려 할 것이고, 결정적으로 내가 불리할 때 그 놀라운 경험들을 어느새 잊어버릴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결국 기적까지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이뤄지길 바랍니다. 때문에 기적을 근거로 구할 때 그것엔 자신을 위한 효용 그 이상의 가치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잠깐에 내리다 그칠 인상적인 폭우가 아니라 철 따라 내리며 꽃을 피울 일상적인 단비였을지도 모릅니다. 계절이 남기는 사철의 풍경처럼 끊임없이 이어질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물이 흐릅니다.
눈에 변하는 게 없는 단조로운 리듬이 모여
하천이 산을 깎듯 조금씩 변하게 합니다.
그 물이 언젠가 깊은 계곡을 파고 떠나듯이
당신의 귓가에 조금씩 흐르던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말씀이
내일이 지나고 오늘을 또 보내서
그대를 변하게 할 흔적을 남깁니다.
극적인 변화. 멋있겠죠.
그래서 신앙인은 은연중에 기적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때로는 극적이면서도
대부분 그 인생 전체를 덮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이 지나가셨던 작은 흉터 위에는 상한 심령이 지나갈 작은 길이 생겨납니다.
좁고 초라할지라도 따라가다 보면 앞서간 이들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가 다스리는 공평과 정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면서도 우리는 기다립니다.
많은 이들은 나팔 소리와 함께 임할 휘황 찬란한 나라를 기다립니다.
이 시간 속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그 나라가 있는데도.
이 시간 속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말이죠.
어째서 하나님을 찾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지
화려한 수식어구 없이
솔직한 마음으로 고백할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신을 찾습니다.
나를 특별하게 해 줄 신을. 그런 기적을요.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