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킴
여러분 한 번쯤 그런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미 신학생 친구들과 함께 많이 해본 말이 있는데요.
“기독교는 참 무례한 종교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당신의 죄를 회개하랍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당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당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거저 받은 것이니 불우한 이웃을 만나면 그렇게 거저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하나님의 당신이 자녀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뒤돌아보면 운명처럼 보이고, 지나고 나서 한번 더 돌아보면 결국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인정하며 눈물을 흘리 게하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저희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상.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 현실적인 해결책과 답이 없어 보이는 현상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라는 말로써 덮어버리는 아주 무시무시한 말을 서슴지 않게 하는 그런 곳.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당신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과 이후로의 모든 삶을 그 말씀이란 것으로 판단하고 인도하며 만들어가야 하는 그런 곳. 그곳이 바로 저희가 함께 나누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가요?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일단 저는 매일 실패하고, 매일 무너지거든요.
그리고 저도 오늘 별로 감동적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별로 재미도 없을 법한 성경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조금 진부하고 지루할 수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성경의 이야기를 정말 아주 아주 간략하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창세기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그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우며, 사실 과학적으로 추정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원 역사”의 이야기가 맨 처음에 나옵니다. 창조의 이야기로부터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그리고 노아의 홍수를 거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 그리고 한 경건한 이들의 족보가 나오며 마침내 데라의 아들 아브람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동하며 이후 한 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 이삭의 아들 야곱. 이 야곱이 하나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며, 마침내 야곱과 그의 일가족은 성경에서 애굽이라고 발음하는 “이집트”로 떠나게 됩니다.
이후 성경은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로운 파라오가 추대됨에 따라 잘 살고 있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갑작스럽게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눈물과 기도 속에서 “모세”라는 히브리 아이가 태어나, 이집트 공주의 손에 길러지며 40년의 왕자의 생활 그리고 40년의 광야에서의 생활 이후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냅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전승상으로 성문화 된 최초의 율법이라 알려진 “십계명”을 주시며, 이후 수많은 기적과 함께 이들과 동행하시며 이들을 인도하여내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이것은 앞으로 항상 언약으로 세워진 백성 이스라엘에게 내려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대손손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된 차기 리더십 여호수아. 그리고 여리고 정탐 때 여호수아와 함께 담대함을 보여준 갈렙. 이렇게 출애굽 이후 새롭게 결성된 새로운 세대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방금 전 말씀드린 “야곱”의 열두 아들의 자손들로 이뤄진 12개의 지파에게 그 땅을 배분합니다.
이후 왕이 없던 이스라엘은 하나의 왕국이 아닌 여러 지파의 연합으로 이뤄진 국가가 됩니다.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어느새부터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에 빠진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마다 이들은 사사의 출현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며 다시 평화의 시기를 누리다 다시 타락을 하고 다시 핍박을 받다가 다시 사사가 출몰하는 역사의 오묘한 순환을 겪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그 왕이 없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다”라는 사사기의 말씀이 나옵니다.
왕이 없음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행정체계나 국가를 막기 위한 군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타민족의 국가와 스스로를 비교하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왕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주십니다. 초기에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던 사울은 이후 그의 죄악을 통해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며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나선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죽게 됩니다.
사울 왕가가 몰락하며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여러분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다윗” 왕입니다.
이 다윗의 왕가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언약을 맺어주시는데, 그것이 역대하 7장 18절에 나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지혜로운 왕의 상징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그 왕위를 이어받으며, 이스라엘은 전무후무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첫 번째 성전까지 짓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말기에 그의 무수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게 되며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됩니다. 여기서 남유다는 다윗의 왕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며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라는 왕이 다스리게 됩니다.
이후 성경의 역대 기와 열왕기서 그리고 많은 예언서들과 관련된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살짝 생략하고요. 이후 기원전 715년. 성경에서 앗수르라 써져있고 여러분은 역사책에서 앗시리아라고 배웠을 제국에게 북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586년. 남유다 왕조마저 바벨론 제국의 침공. 여러분이 네부카드네자르라고 알고 계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3차 침공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이때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완전히 황폐화되고 수많은 국민이 포로로 끌려가며, 오랫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던 예루살렘의 성전마저 철저하게 파괴되고 약탈당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얼마 안 가 바벨론을 밀어내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아는 영화 300의 악역으로 나온 크세르크세스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에스더”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멸망. 곧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이스라엘은 거대한 고민과 환난에 휩싸입니다.
어찌 이방신을 섬기는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패배할 수 있는 것인가? 당시 국가 간의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갈등과 이권 다툼을 넘어서 각 나라가 섬기는 “신들의 전쟁”이라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이방인의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짓밟히는가?
이때 이들이 찾았던 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패배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난 것이었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회복의 선포와 약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70년 뒤. 관용정책을 펼치며 이후 역사 속에서 대왕이라고 추대된 키루스 2세. 성경에서는 고레스 왕이라고 말하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는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그 유명한 “고레스 칙령”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이스라엘은 포로 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스룹바벨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은 70년 전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며, 이후 페르시아에 의해 파견된 총독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벽까지 다시 세우게 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바로 저희가 오늘 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맥락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째 달 초 하루.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된 상태에서 해방되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념하는 그 절기가 가까워졌을 무렵. 온 백성 앞에서 율법책.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언약으로 시작되어 언약을 어겨 심판을 받으며, 다시 하나님이 언약으로 회복되는 민족. 그들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던 이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 믿는 이들의 성공담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민족. 노예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며 자유를 주시고 그분의 백성을 삼으셨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언약 가운데에서 그 말씀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명령받았던 이스라엘. 그리고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마침내 이방 국가를 통해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나라를 잃고.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중을 떠나심을 경험했던 그 이스라엘 백성. 이들이 율법책을 읽었다는 것은 출애굽 한 백성을 향한 모세의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 하나님의 언약과 이들 조상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완전히 멸망당하는 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조상들이 살던 언약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고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들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모든 백성이 다 그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이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는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인 “사라”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이 사라라는 말은 이기다, 다스리다, 이끌다 라는 의미를 가지며 엘 곧 하나님을 목적어 둬서.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인 이스라엘에서. 이 사라의 주어가 엘. 하나님이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이끄신다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조상들이 많은 모세로부터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토록 귀 따갑게 들어왔던 잔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라.”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도 말씀에 따르지 않고 항상 죄에 빠지고 또 죄를 짓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이 백성. 다시금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죄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무례하고 지루한 잔소리를 시작할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두 번째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예배에 충실하고 그 믿음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도. 결국 우리의 죄성. 우리의 배타적인 자기 중심주의. 곧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가 되었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게 되는 슬픈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줍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의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듯이 오늘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우리가 좋은 사람임을 반드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어도 죄짓잖아요. 그리고 다시 회개 기도 하시잖아요.
이스라엘 역시. 그리고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저 역시. 그렇게 실패하고 그렇게 또 회개하고 다짐하여도 다시금 유혹에 넘어지는 한낱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아온 것은, 절대로 우리가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매일 주일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말씀이라는 잔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항상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이라는 성경의 비유가 틀리지 않을 것은. 밥 먹듯이 돼 뇌이며 마음에 새기고 있어도 우리는 이것을 지킬까 말까 한 연약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은 회개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며,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시작점이 된 것도. 그 사회적 계급과 계층 지위를 막론하고 선교사와 장로들 많은 이들로부터 터져 나왔던 회개의 물결. 바로 뜨거운 눈물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었습니다.
회개는 부끄러운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사랑한다는 말이 바로 나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예수님이 기다리신다는 말이 바로 나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때를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래오 나는 결국 하나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나도 하나님 참 사랑합니다.” 그 고백으로 우리는 다시금 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에 대한 감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회복. 이것이 말씀을 다시 마주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회개는 눈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백성이 그 직후에 한 일은 바로 아주 철저한 돌이킴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자. 무너졌던 이스라엘은 다시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한 돌이킴으로 되찾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와 자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교회로서 이 자리에 모인 주님의 자녀 여러분.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신학생 나부랭이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좀 더 편한 길을 택할 것이냐. 그 유혹 속에서 한 번이라도 흔들렸던 여러분. 그 실패. 인정하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실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을 향해있던 하나님의 손 내미 심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지금까지 참 멀리 돌아왔잖아요.
여러분 오늘 들으셨던 말을 또 잊으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실패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변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아올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돌아가시길 간절히 간절히 권면하는 바입니다.
저의 실패와 저의 아픔, 저의 못남과 저의 모자람. 그것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만 쓰임 받을 수 있는 한낱 종일뿐입니다. 제가 대단한 것을 자랑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를 쓰시는 분이 대단한 것을 자랑하러 나온 것입니다.
이때 우선 무너져야 할 것은 바로 여러분 앞에선 제 자신이겠습니다.
여러분 설교자 김규광이 무너져야만. 설교가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사 김규광이 죽어야지만 여러분이 사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남아계셔야만 교회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의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며, 우리의 한계라는 빈들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일해오셨습니다.
나의 부족함 위에 어떤 성전과 어떤 성벽을 지으려고 해도 결국 나의 죄악과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세워야 할 것은 나의 성공이 아닌 실패한 나를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단 하나뿐입니다.
사랑하는 가드 여러분. 기독교가 무례하다고 했잖아요.
여러분이 찬양의 사역자라면 여러분이 무너져야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돌이켜야만, 그렇게
가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엎드러져야만 그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가드가 아닌 하나님의 가드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당신의 죄악과 믿음의 실패에 메여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다는 것은 무너진 자리 위에 다시 한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언약을 기억하여 말씀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던지지만, 언제나 실패했던 이들을 향해 “여호와께 돌아와라. 그가 너를 회복시키리라.”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말씀 앞으로, 말씀을 향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돌이키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