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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된

그럼에도 찾아주시는

by 광규김

소시민의 삶


평범한 소시민에게 오늘을 살라는 말이 어찌 쉬운 일 아닙니다. 세상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오늘은 어떤 원대한 꿈이나 위대한 대의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더 큰 감사와 감동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그런 사람들의 삶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은화 한 데나리온의 값어치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마 20장 2절)


오늘날로 말하자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먹고 작업복과 안전화를 챙겨 신은 후 인력사무소에 나가 알선된 일자리에서 하루를 일하고 돌아와 받는 돈.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고정되고 안정된 직장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고, 그만큼 쉽고 간단하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의 일용직 노동자들. 흔히 말하는 막일꾼이 있었으며, 이들은 매일 아침 시장에 나가 자신을 데려가 일을 시켜줄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혼자 살던지 가족을 부양한 가장 이든지 간에 이들은 하루 종일 노동해야만 다른 하루를 살아갈 양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때 고용주는 아침에 시장에 나와서 일꾼을 찾아 일을 맡기고, 저녁쯤 되어 그날의 품삯을 치러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즉, 남들이 다 불려 나가는 제시간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평판이 좋던지, 운이 좋던지, 아니면 능력이 좋던지, 건강하던지 하여. 어찌 되었건 간에 그들 중 그나마 성공적인 하루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살아내고, 하루를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창 꿈과 목표를 향해 그 젊음을 꽃피울 시기인 청년들의 마음은 수많은 질고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공


비교와 경쟁. 평가와 판단. 승리하지 못한다면,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대로 도태되어 버리는 사회. 참 슬프게도 이 모든 건 더 이상 멀리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것. 앞서가는 것. 최고가 되는 것. 유명해지는 것.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남보다 잘해야 하고, 남보다 잘나야 함을 끊임없이 증명하도록 요구당합니다. 행복하고 세련된 모습을 언제나 남들에게 내보여야 하고,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허영심을 물직적 가치에 있는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인간됨의 가치 곧 인격의 존엄성과 나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삶은 풍요의 우상들의 심판대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재물 곧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인류 사회를 지배해온 풍요의 우상들에 대한 썩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이들의 가치에 의해 인간의 삶의 가치가 결정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잘해야 한다고, 또 잘해야 한다고, 더 잘해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안 된다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부족하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청년들의 숨통을 옥죄며 그들의 심령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너의 공로가 모자라서 너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그 가녀린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를 인격의 가치로 환원시켜버리는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매달리고 버텨오면서 사는 오늘이 얼마나 행복할 것 같나요?


번영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여러분의 삶은 어땠나요?


오늘은 또 어떤 ‘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와 염려’를 품고서 당신의 그 무거운 발걸음을 이곳까지 옮기셨을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교회 역시 그런 성공주의적 세계관과 번영을 찬미하는 신학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지 않습니까? 이미 너무 많아서 수많은 문제를 낳고 지탄을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도, 교회를 섬기는 사람도 저희를 짓누르는 구조화된 패배주의와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세속적 판단으로부터 모든 것이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을 더 환대하고 더 친해지고 싶지 못나고 초라한 사람을 똑깥이 기뻐하고 가까이하는 경우는 많지 않거든요.


그렇게 때로는 억울하고 또 때로는 서러운 생각에 기도하며 따지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나와 설교를 한다고 하는 저 역시 마음이 연약하여 한참을 방황하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았습니다. 사실 오늘까지도 하루도 그런 고민을 완전히 떼어놓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


하루를 사는 게 힘들었고, 내일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뭘까요? 우리가 그렇게 간구했던 은혜가 뭘까요? 우리는 은혜를 왜 은혜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나로서는 감히 구할 수도 없고 감히 갚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은혜라는 것은 일찍 부름 받았든 간에, 늦게 부름 받았든 간에 이들 모두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하루를 일할 수 있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들의 생계수단이라곤 가진 몸뚱이 굴리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부모에게 전문 지식이나 기술 혹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말씀드렸다시피, 쓸만한 사람은 보통 아침에 불려 나갑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포도원의 주인은 제 삼시, 제 육시 그리고 제 구시까지 나가서 일할 사람을 포도원으로 데려왔습니다. 주인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자신의 포도원에 들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나중 된 사람들 중에서는 찾아주는 이가 없었다면, 할 일을 찾지 못해 차마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가장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왔지만, 잠시 후 돌아가 처자식에게 오늘의 생활비를 구해오지 못했다고 말할 아버지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기술을 가르치거나 물려줄 부모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던 청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간신히 일을 찾아서 하루치 품삯을 받을 때 먼저 왔던 이들이 왜 우리도 저것들과 같은 돈을 주냐고 따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당장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렇게라도 굶지 않고 하루를 더 살 수 있었다는 것이죠.


나중 된 종


언젠가 성경을 읽다 보면 내 한 몸 건사하기 어려운. 그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나면 아마 제 삶이 그 모양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은혜가 간절한 삶은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장 인생에 위로라도 주고 싶어 “천국이 있다.”라고 말하는 게 아무것도 바뀔 것이 없을 때 붙잡으라는 막막한 희망 고문으로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도 큰 축복이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쉽게 와닿지 못할 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 속에는 당장 사는 것이 그에게 무거운 짐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을 입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사실 순탄한 인생을 살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12살 때 집안의 가장 요셉을 여의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지는 오늘날로 따지자면 18년 동안 한부모 가정의 가장을 맡아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역시 치열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셨습니다.


그분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물고기를 낚지 못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어부 베드로와 돈을 위해 민족을 배신해야 했던 세리 마태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끌어 오셨던 분이 바로 나사렛의 목수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평범한 이들의 삶의 자리를 향해 그리고 그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들의 삶의 현장으로, 심지어는 더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찾아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고 먹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나중 된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복음을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주한 인생 앞에 스스로가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전재산 두 렙돈을 바친 과부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려 하여도 다른 사람들 보기엔 아무런 쓸모 조차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당신의 전부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중 된 종 곧 작은 자일수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당신의 중심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이건 자신을 내려놓고 교회에 봉사하라고 종용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중 된 종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죠. 내가 일찍 불려 갔든 간에 내가 늦게 불려 갔든 간에. 자신을 데려가 일을 시켜줄 주인이 있다는 것. 나중 된 일꾼은 그것이면 충분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되라고. 먼저 된 자는 당연히 먼저 된 자만의 더 많은 데나리온을 받아야 한다고. 나중 된 자는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거라고. 그러나 이 말은 절대 당연한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에게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 크리스천들에겐 결코 당연한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때.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라주고,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이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시며 그의 포도원에 나중 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그들이 오늘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우리가 증언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본질에 대하여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만나는 이웃을 대할 때도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품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사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몰라요.


아침에 부름 받아도. 점심에 부름 받아도. 제 십일 시 곧 저녁 5시쯤 부름 받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설교가 길죠? 그러니까 결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오늘도 고생하셨다고요. 오늘 여러분 앞에서 설교를 하고 가는 저는 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귓가에 들릴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당신이 사랑받으며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예수께로 오십시오. 그 안에서 잠시라도 쉬어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오시기까지 여러분의 삶은 어땠나요?


오늘은 또 어떤 ‘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와 염려’를 품고서 당신의 그 무거운 발걸음을 이곳까지 옮기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세상에서 여러분과 함께하도록 허락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주변에 있을 수 있도록 허락받는 시간 동안 오늘도 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을 당신의 삶이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함께하겠습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이 당신이 받은 선물을 선물로서 살아가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분명히 그리 하실 것이며 지금까지 주님은 당신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항상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중 된 이웃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가 품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뻔한 잔소리 또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나중 된 자들을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 천국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곳에 오기까지 고된 삶을 살아오셨을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을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에서 오늘도 이뤄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위대한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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