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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 위로하지 않음은

본질은 그것이 아니기에

by 광규김

내가 걷지 않으려는 길


종교가 마음에 위안이 될 수가 있지만 나는 종교로는 위로하지 않으려고 한다.


의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도사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종교로 위로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종교로서 위로한다는 것은, 그를 그저 포교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종교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자신의 삶에 지침으로 삼는 지고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종교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가치관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종교적인 것이다.


곧 종교란 세계관의 변화를 뜻한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할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에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종교가 포교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본연의 가르침이 바라는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본다.



본질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들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닌가?'. 이것은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복음이란 것이 예수 그 자체이며 그분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진정 전해야 하는 것은 교리보다는 사랑이다. 교리를 가르치기에 앞서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지 못하다면 교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들 울리는 소음과 같음은 어찌 알지 못할까?


때문에 나는 종교인으로서 종교로써 위로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람대 사람으로서, 인격대 인격으로서 사람을 대하고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종교로 위로하기보다 종교의 가르침으로 바뀐 내가 위로하겠다는 소명을 따르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더욱 본질에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글을 적는 것이다.


많은 종교인의 실수가 힘든 이들에게 종교로 귀의해보라는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칫하면 힘든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포교만을 하려는 사람으로 비출 수 있다. 위로는 다른 게 아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이 말씀을 한 번은 더 기억해보는 게 아닐까.


중요한건 자신이 받았다는 그 사랑을 어떻게 올바르게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사랑으로 바뀌었다 전하고자 한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사랑해야할까라는 질문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한번 자신이 제대로 그 가르침을 배운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종교인이지만 종교의 세를 늘리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거부감마저 들지경이다. 제도 종교에 그만큼 실망한게 많고 상처받은게 많아서 그렇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가르침에 집중하여 그것을 삶으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종교로써 위로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사랑으로서 위로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위로를 하고 싶어하는 많은 종교인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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