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이유로 핍박을 받는 이들에게
오늘은 교회를 떠난 여러분께, 그리고 교회를 떠나려 고민하는 여러분께 한 가지 글을 써볼까 한다.
공동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여러 나눔을 하지만 그 마음이 꼭 하나가 되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외로운 계절이 찾아올 수 있고 공동체에게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 찾아올 수도 있다.
오늘은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한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이야기다.
여러 복음서에서 증언하는 이 이야기는 12년간 병을 앓아온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여인은 주인공으로 보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잠깐 만나고 지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갖은 시도를 하고 재산을 썼으나 그녀는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당시 의료체계는 지금처럼 전문적이지 못했고 그에 따라 당시 의료인들 역시 지금과 같이 높은 신뢰와 기술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이로의 딸을 구하러 가는 길목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따랐다. 그 군중이 밀치며 무리는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당시 혈루증을 앓는 환자는 머무른 곳과 닿는 모든 것이 더러운 것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12년간 그녀가 받았을 아픈 취급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무리를 뚫고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봤으면 그녀가 당할 핍박과 폭력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기피의 대상이었고 민중에서 가장 깨끗하다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종교적 지도자인 사두개인들에게 그녀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더러운 존재였다.
그녀가 두려워 떨며 지나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를 믿는 백성이었으며,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그녀를 12년 동안 핍박해온 근거 역시 여호와의 말씀인 율법이었으며, 그 율법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녀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잡는다. 당시는 여인이 먼저 남자를 만지는 것조차 더러운 것 취급을 받는 세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용기와 믿음을 칭송하지만, 그 옷자락을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포기와 절박함을 느꼈다. 더 이상 내어줄 재산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도와달라 부탁할 용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믿는 자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마음의 무너짐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는 아주 특별한 말을 한다. 이는 예수의 이야기인 4권의 복음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나온 한 단어로부터 비롯된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그녀만이 예수의 딸이라 칭함을 받았다. 수없이 많은 무리와 제자들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자녀로 불려졌다.
친구도 가족도 등장하지 않는 그녀는 대신 구해달라 부탁할 아버지가 있는 야이로의 딸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외롭고 처참한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그녀의 아버지이자 가족이 되어줬다. 그리고 다시 예수는 말한다.
"평안히 가라."
이 말은 당시 병을 치료받은 혈루증 앓는 여인과 더불어 그 주변에 있던 그를 따르는 모든 회중을 향한 말이었다.
'내 딸이 돌아가니 이제로는 그녀를 평안히 가게 하라.'라는 말로써 말이다.
그녀는 예수를 평안히 찾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소위 예수를 따르는 이들 때문이었다. 자칭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평생을 핍박받아온 그녀에게 이제 말씀하신 것이다. '내 딸이 평안히 가게 해라.'
이제는 혐오하지 말고 핍박 받게 하지 말라는 공언이었다.
당시 예수는 종교적 이유로 더러운 것 취급을 받아온 존재의 가족이 되어주셨다. 하나님을 믿는다던 백성에게 부정한 것 취급을 받아온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당시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던 위선을 고발한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라는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을 12년간 혐오해온 이웃과 군중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이 생겼고, 자신의 편이 생겼다. 그녀는 평안히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발걸음이 마냥 평안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편견까지 고쳐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삶은 오롯이 그녀가 마주해야 할 고난이었다.
시편 23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그렇다 당신 앞에 있는 저 사망의 골짜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은 그 위를 지나야 한다. 마치 그녀의 앞으로의 삶처럼 당신에게 바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지 않음은 더 이상 이 세상과 골짜기는 나를 죽이려는 사망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과 동행하는 창조주가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대가 이제로는 평안히 가기를 바란다.
종교적 이유로 종교인들에게 더러운 것 취급받은 당신에게.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나 역시 이곳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음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 속에 살아야 했었다면 이제로는 평안히 길을 갔으면 한다.
오히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받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기에, 종교인의 위선에 핍박받은 당신이 이제로는 평안히 당신의 길을 떠나 길 바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의 믿음만이 당신을 구원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