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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벤츠를 탈 수 있나?

정당화

by 광규김

# 정당화


언젠가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목사도 벤츠를 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장 마지막에 타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남았는데 신앙이 말하는 도덕적 삶과 개인의 이기심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기복이란 무엇인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풍요의 제의를 올리는 바알 멜카르트에 대한 신앙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고대의 신론에서 신은 특권계층이었으며 지배계층에 비유되었다. 이들은 인간을 노동해야하는 존재로 보았으며, 이는 신 곧 특권계층을 위해 마땅히 해야할 일들이라 포교했다.


신앙이 기득권자의 이윤을 대변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있어왔고, 지금 프로테스탄티즘의 능력주의에도 깃들어 숨쉬고 있다.


자신이 부와 사치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 내면에 잠든 기복주의적 신앙의 배덕함을 용인하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형화된 교회들이 자리잡게 되었고, 약자를 대변하는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니라 아세라의 품에서 향락을 누리는 배교의 장이 되었다.


종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고대 근동의 신화가 으레 그랬듯 특권 계층의 편에서 그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며 오만한 신학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복주의의 진정한 문제는 신앙으로 능력주의적 오류를 정당화하고서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차원으로 소급시키려든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계층간 갈등과 반목을 심화시켜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지 못학 막아왔다.


기독교는 다스림에 대한 것을 논하는 종교이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로했고 하나님의 나라 곧 그의 다스림을 전파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이 다스림이란 말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해두어야만했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누구로 인해, 누구를 위하여에 대한 것들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이윤을 충족하기 위한 타락한 신앙의 모습을 보인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우리의 왕과는 무관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릴 자격은 있으나 베풀고 나눌 마음은 없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다. 그리고 신앙의 저편으로 이 불편한 생각을 밀어 넣으며 애써 끔찍하고 참담한 심정을 감추려 든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가? 가진것을 가난한자를 위해 나누고 자신을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에 망설이는 우리의 모두의 이야기와 같다. 공의와 정의의 다스림을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과 같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두려워했고 나는 망설였다. 나는 애써 눈을 감았고, 고개를 돌렸다. 악취는 내게서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가난한자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입술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을 과연 옳다할 수 있을까? 그런 몸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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