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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발 디딜 곳 없는

by 광규김

#예수가 발 디딜 곳 없는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 종교에 열심히며 말씀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이들에게는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이들은 그가 찾아가야 할 이들이 되었다.


성경은 신앙인의 현실을 고발했다. 말씀에 따라 혐오하고, 말씀에 따라 미워하는 이들. 말씀에 따라 무시하고, 말씀에 따라 차별하는 이들의 모습을 들춰냈다. 다름 아닌 그들의 하나님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시는지가 그들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 줄 알았고, 그 거룩한 전당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곳에서 열심히 예물을 올려드렸고 그곳에서 죄 사함 받았다 고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은 육신을 입어 그들 가운데 있었으며, 아픈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인과응보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 앞에서 병자를 치료하며 '네 죄가 사람을 받았다'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서도 경종을 울리지 않는 종교인이라면 이미 틀린 게 아닐까 싶다. 그리스도가 어디에 계신데,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하고 계신데... 그들은 거룩한 성전에 틀어박혀 하나님의 동행에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결국 거지들과 병자들이 그의 곁을 둘러싸며 그를 따라다녔다. 복을 받았다 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던 이들이 그의 동행자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포하셨다.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이 뻣뻣한 백성 곧 완악함이 마음에 가득 찬 이들은 눈을 가리고 옷을 찢으며 재를 뒤집어썼다.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정해서는 안됐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시지 않고 계셨음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인물은 제도 종교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각종 파격적인 언행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언약의 성취를 위해 죽었다. 오늘날 언약을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과 달리 예수는 그 삶과 그 가르침이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마음이 가득 찬 종교인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들이 명절을 보내고 유월절을 보낼 때 그들의 왕의 이야기는 온통 죽음으로 써내려 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부활했을 때 그것을 가장 먼저 부정했던 이들이 바로 제도 종교의 수호자들이었다.


이방인과 당시 법정에서는 법적 근거로도 채택되지 않던 여인의 증언이 예수의 부활의 첫 증거가 되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잊히고 무시당하던 이들에게 내려진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땅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제자를 삼으라 하였건만 정작 제자가 되어갔던 이들은 제도 종교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 이상의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치적인 존재들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다.


자, 이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언덕의 바위가 터지며 우레 소리가 하늘에 가득하다. 백 부장은 말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리고 그는 성전 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갔다. 끝까지 그는 성전을 외면했다. 그 안에 본질이 있지 않고 그 따위 것은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이윽고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인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유대의 종파는 발리새를 제외하고 전멸했으며 그들의 성전은 파괴당하고 유린당했다. 지금은 여러 종교의 성지로서 남아있는 그 터는 복음과는 무관했다.


성전은 예수가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그곳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이 머물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낮은 곳으로 떠나길 찬양하는 이들이 바라는 모습은 찬란하고 영광된 모습이다. 기억하라. 휘장을 찢으실 때 그곳에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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