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과 엘리바스
욥과의 대화에서 엘리바스는 나라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 말한다.
욥의 고통과는 완전히 무관한 꼰대 신앙인의 조언이었다. 그는 욥의 절규 앞에서 하나님은 변호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쉬운 위로와 충고로 들렸다.
허무한 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가장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란 헛소리를 하던 사람들처럼 그 말은 누구도 살리지 못했으면서 여호와를 운운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 이름을 사랑과 무관한 곳에 쓴다는 건 심각한 오용과 남용이 아닐까 싶다.
신학 역시 그러기가 쉽다. 그저 바른 소리를 강단에서 선포하면 모든 게 회복되고 바로잡힐 것으로 착각하기에 용이하다. 그것이야말로 책 몇 줄 읽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겉멋 든 신학도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로랍시고 공감을 운운하고 아무런 깊이감 없는 언어로 뻔한 표현을 남발하는 것 역시 꼴사나운 일이다. 나는 너무나 쉬운 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던 복에 대한 관점과 인과응보적 신학과 신앙은 고통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어긋난 진단을 내린다.
피상적인 고찰에 불과한 짧은 통찰로 문제에 다가서려고 하니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생명을 줄 수가 없다. 그런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
열심히 자신은 구원받았다 찬미하지만 정작 손 내밀어 구해야 할 이들에게는 닿지 않는 껍질뿐인 가라지라는 것이다.
고통을 느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고통에 다가설 수 있는 상상력이 있느냐는 문제다. 감히 맞닿을 수는 없지만 그에 근접할 수 있는 깊은 심성이 있느냐는 문제다.
다시 욥이 우리 앞에 있을 때 그의 입술에서 여호와에 대한 고백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건 그 고백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욥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앙을 갖기 위함이 아니가. 종교로 위로하라는 말이 아니다. 종교가 가르친 그 사랑으로 위로하라는 것이다. 믿으라 말하라는 게 아니라 믿는 나의 말함으로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심하라는 말이다. 믿음은 강요가 아닌 들음에서 난다. 그리고 그 들음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신앙의 말함에 따라 갈라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