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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걷는다는 건

그대가 삶을 감당할 이유

by 광규김

들어가며


바뀌는 날씨를 이제야 체감할 만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왔다. 공부를 하고 여러 팀사역을 하고 고정된 사역을 하다 보니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이 성큼 다가온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연말이 되면 조금 더 바빠지겠고 여러 일정이 생겨나겠지만 기분이 좋다. 나는 천성적으로 바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내게 소명이라 여겨지는 길을 걸어가며 사는 것은 내가 아무리 바빠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고 있다. 새로운 앨범이 다음 달 중순부터 나온다. 그리고 때에 맞춰 준비한 영상도 공개하게 될 예정이다. 무언가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다.


고민으로 보낸 시간


고민하며 글을 적게 된지도 여러 시간이 흘렀다. 원래 같았으면 진즉 마감을 했어야 할 이 글을 아직 한참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전개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그만큼 내가 나의 소명에 뚜렷한 무언가가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명을 모르겠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내가 평생을 몸 담고 싶은 분야를 찾지 못했다. 글을 쓰며 정리하니 생각이 뚜렷해진다. 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소명을 걷는다는 것


소명을 걷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여전히 이 길이 내 길인가 하는 흔들림 속에 있고, 여전히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하는 심려가 가득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것.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놓지 못하는 그 길이 바로 소명의 길이다. 아픈 마음이 향하는 곳이 그의 사명이 있는 자리다. 그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가슴이 타오르고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드는 것이 바로 그의 인생을 던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한다. 어째서 그 길을 선택하셨나요?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까지 이야기한다면 한참을 붙잡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최대한 간추려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너무 긴 담화는 자칫 내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까지 흐려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려고 했으나 저를 살게 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것으로 지금까지 살아있고, 그것을 위해 죽을 생각입니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요 나의 간증이다. 내가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것. 오직 "사랑"의 이름이 내게 새 삶을 선물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삶은 그저 받은 것이다. 나의 노력과 공로가 없이 거저 주워진 것. 이것을 한 단어로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란 내가 차마 구할 수 없는 것을 받은 것이다. 은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리 위에 임한다. 은혜는 그렇게 무너진 가슴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메마른 땅을 다시금 일으킨다. 은혜가 내려온 그 자리에는 다시 싹이 트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은혜의 놀라움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변화로써 향하여 죽기까지 달려가는 결심을 바로 소명이라고 말한다. 소명은 그렇듯 은혜 위에 있는 것이며 은혜의 열매로 맺어진 결실이라.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생명을 살리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빛이 되는 것. 죽으려고 작정한 이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사랑이다. 때문에 사랑의 오래 참음은 소명이 시작될 때를 기다린다. 천사의 말과 같이 선하고 옳으며 달콤한 말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굉가 리와 같으며 아무런 소용이 없음 사랑만이 찢어진 가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이유를 찾는 것. 고통을 감당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 고난을 감내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소명이다. 때문에 소명을 걷는 일이란 때로는 엄청난 결심과 수난을 예고하기도 한다. 강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길이지만, 지극히 보잘것없고 연약한 이들에게 결심을 촉구한다. 그들이 삶을 견뎌낼 이유가 된다. 이윽고 그들의 삶 자체가 된다. 그것이 바로 소명이다.


그대 이 길을 진정 걸으려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나는 스스로 되묻는다. 진정 이 길을 가렸는가. 그럴 땐 베드로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로마를 떠나 도망가려는 그날. 저 멀리 아피아 가도로부터 지평선을 가르며 한 사람이 다가온다. 그는 환상 속에서 그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도망쳐온 저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간다.' 환상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갔고 그의 소명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 나의 꿈은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이 피를 흘린 자리에서 나 역시 죽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 그들이 사랑을 위해 내어 준 것들을 나 역시 온전히 내어주기를 원한다. 죽음. 그것이야말로 내 소명의 끝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순교를 꿈으로 가지고 있는 청년을 보면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흐려지는 마음에도 불구하고서 이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비웃음이 있더라도, 누군가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나는 사람의 인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기억되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다. 내 죽음은 온전히 사랑을 위한 내어줌이며, 내 삶처럼 나의 숭고한 사랑의 표현과도 같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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