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있어서
상상력이 없는 신학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이 행함이 없으면 죽었다 말하듯 말이다. 오직 제의에 골몰하는 신학이란 게 그렇다. 이때 상상력이란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타자의 아픔을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와는 달랐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괜찮을 거야 말하는 위로가 있다. 때로는 그런 의연함에 마음이 치유를 받고는 한다. 아픔에는 맥락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짚어주는 것이야말로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해야 할 일이다. 기대고 싶은 곳은 나의 바다에 격랑이 몰아칠 때에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믿음의 조상은 소망의 닻을 내리라 말했다. 무엇이 있을 줄 모르는 바닷속으로 완전히 잠겨야만 비로소 소망은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소망은 저 아래에 무엇과 함께 있던지 간에 그리고 그 바닥에 무엇이 있던지 간에 가라앉아 묵묵히 붙잡아주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소망이 된다는 것은 아픔에 함께 아파하나 그 마음 한편을 내어줄 빈자리가 아직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함께 흔들리며 죽음을 점치는 믿음 없는 무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때에 믿음은 소망에 묶인 배와 같다. 그것이 신앙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이란 다 겪을 수 없는 아픔은 겪는 일을 말한다.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고하는 인간의 힘이며, 지성체의 진정한 능력이라 말할 수 있겠다. 상상력을 두려움을 배가시키나 상상을 함으로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형이하학적 고난을 형이상학적 통찰로 뚫고 나가는 권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인 상상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믿음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상상은 논리와 개연성이 있어야만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성이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지금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풍랑이 울고 있는 바다 위에서 두려워 떠는 것은 경험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우는 양과 함께 우는 것은 상상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잠겨 흔들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소망이며 마침내 그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주님은 물결 위를 걸어오실 것이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꾸짖기 위해.